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들: 타마르 | |||
---|---|---|---|---|
이전글 | [성경용어] 사랑의 네 종류들, 나해 부활 제6주일 전례성경 공부/묵상 동영상 자료 | |||
다음글 | [구약]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이사악의 결혼과 야곱과 에사우의 탄생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5-10 | 조회수3,656 | 추천수0 | |
[성경 속의 여인들] 타마르
타마르는 유다의 며느리다. 타마르는 시아버지 유다의 뜻에 따라 유다의 맏아들, 에르와 결혼했지만 일찍 사별한다. 타마르는 유다의 다른 아들, 오난과 결혼하지만 오난 역시 일찍 죽는다. 에르는 악하였고 오난은 형의 자손을 잇는 것을 거부한 탓에 주님이 죽이셨다고 성경은 전한다(창세 38,7.9-10 참조). 유다의 율법은 형제가 자식 없이 죽으면 또 다른 형제가 후손을 보기 위해 형수와 결혼해야 했다. 한 집안의 여인들은 어쩌면 ‘씨받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다에게는 셀라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다는 과부가 된 타마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데, 자신에게 남은 아들, 셀라가 타마르를 만나 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예전, ‘여자를 잘못 들이면 집안이 망한다’는 볼썽사나운 남자 사람들의 비겁한 말이 있었다. 대개 집안의 우환을 집안 여인들에게 덮어씌우는 장치로 사용된 말이었다. 아들을 못 낳거나, 집안의 가세가 기울 때 여지없이 등장한 것이 며느리를 잘못 두었다는 말이었다. 집안이 잘되면 제 자식 자랑에 침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게 ‘시댁 식구들’이었다.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들의 욕망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규정되고 정리되며 버려졌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그 시대의 연장선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유다는 자신의 아내와 사별한 뒤, 팀나로 양의 털을 깎으러 떠난다. 때는 봄이었고 양털 깎는 축제의 때였고, 그때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때였다. 시아버지의 두려움 때문에 버려진 타마르는 시아버지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창녀로서 나타난다. 유다는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한 채 한자리에 들었고, 유다는 부지불식간에 며느리를 통해 자신의 아들을 얻고야 만다. 입에 담기 어려운 일이고, 있어선 안되는 일이지만 성경은 그 어떤 윤리적 심판을 전하지 않는다.
타마르는 정확히 유다의 비겁함 안에 숨겨진 남자의 욕망을 겨냥했다. 타마르는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그 속임수로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창녀로 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아버지의 비겁함과 나아가 남자들 위주의 관습 한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내어던졌다.
타마르는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자신과 관계한 증표로 인장과 줄, 지팡이를 건네받았고 그 증표를 통해 유다를 두려움과 비겁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인장과 줄과 지팡이가 누구 것인지 살펴보십시오”(창세 38,25). ‘살펴보다’라는 동사 ‘나카르’는 ‘인정하다’, ‘깨닫다’의 의미를 지닌다. 유다는 그 증표를 확인하고 인정하고 부끄러워했으며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세 38,26).
창세 38장의 타마르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요셉이 형제들의 질투와 욕심 탓에 이집트로 팔려간 이야기와 요셉이 포티파르의 종으로 그의 아내에게 유혹당하는 이야기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인간의 질투와 욕망 사이에서 창세 38장의 타마르 이야기는 성경이 말하는 ‘올바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올바름이란 윤리와 규범의 수동적 준수에 있지 않다. 부조리한 사회적 관습 뒤켠에 숨죽이는 모든 비루함과 비겁함과 두려움을 떨쳐내는 용기와 노력이 올바름을 견지하고 지켜낸다. 시편은 타마르를 의인으로 묘사한다(시편 92,13에 야자나무〔종려나무〕는 의로움을 상징하는데, 타마르라는 이름의 뜻이 야자나무〔종려나무〕다). 그 타마르의 이름이 죄인의 자리에서 의로움과 구원을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족보 안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다(마태 1,3 참조). 타마르 이야기는 유다의 성찰과 회개의 이야기고 타마르는 오늘 나의 비겁함과 비루함에 올바름을 깨우치는 따가운 회초리다.
[2021년 5월 9일 부활 제6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