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이야기4: 구약과 신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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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6-01 | 조회수4,179 | 추천수0 | |
구약 이야기 (4) 구약과 신약
구약을 읽으며 느꼈던 많은 의문들과 거부감들이 단지 현대인들만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구약의 하느님 상과 신약의 하느님 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예수님 시대 직후, 소아시아의 시노페 출신 마르치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구약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은 도저히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이실 수 없다고 말하며, 신구약을 대립시켜 분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 복수하는 하느님, 정의를 내세우며 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던가!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비롭고, 용서하시고, 죄인을 부르시는 하느님과는 합치시키기 힘들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 상과 신약의 하느님 상이 많이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복음을 열쇠로 구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되는 부모의 행동들이 있지 않던가. 어릴 땐 그저 야속하고 무서워 보이기만 했던 부모의 모습이, 성인이 되어서야 다르게 보이는 때가 많다. 그 안에 담긴 깊은 사랑을 나중에야 깨닫는 것이다. 유배를 겪은 유다인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주신 징벌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과거를 성찰하고 후회하며, 백성들은 그저 하느님을 정의로운 심판관으로만 여겼다. 자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우리는 약자를 아끼고, 죄를 용서하는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때로는 과격한 듯 보이는 하느님의 모습에 가려져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발견하지 못해서이지는 아닐까. 저자들이 겪었던 처참한 상황들, 저자가 백성들에게 주고 싶었던 메시지, 그 표현 방법들…. 그 모든 것들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면 그 안에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다. 많은 부분이 당시의 문화와 인식적인 한계 속에서 단편적으로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예수님의 공생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큼인지 알 수 있고, 그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난 하느님을 통해 구약의 하느님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약의 경륜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오심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는 비록 불완전하거나 일시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교육 방법 전체를 증언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2항.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비추어 구약 성서를 읽는다…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9항.
구약의 하느님을 다시 제대로 만나고 싶어지지 않는가?
[2021년 5월 30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용소막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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