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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가난한 부자 - 야고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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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12 조회수4,172 추천수0

[신약 성경 다시 읽기] 가난한 부자 - 야고보서

 

 

LH 공무원들의 일탈은 한국 사회 구성원이 지니는 일탈하고픈 마음과 정확히 조응한다.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다.)’이라는 간절하다 못해 비루하기까지 한 말이 오늘 한국 사회에서 땅 한 평 없이 사는 이들의 일상을 조롱하듯 꿈틀거린다. 야고보서를 펴는 순간, 부끄러움은 바다 물결 마냥 출렁거리며 밀려온다.(야고 1,6) 세상에 대한 자조섞인 비판으로 채색된 정체 모를 부끄러움이 아니라 땅 한 평 없는, 그럼에도 부자이고픈 ‘갈라진 두 마음’(야고 1,8)의 부끄러움이다. 좀 더 가져서, 좀 더 편한 삶과 윤택한 삶을 꿈꾸는 일에 성직자의 이성적 절제마저 힘없이 무너지는 일상의 체험이 ‘영끌’의 사회 현상에 정확히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썼다고 여겨지는 야고보서. 대개 야고보서에 나타난 그리스어 수준이나 구약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의 사용, 그리고 제도 화 되어가는 초대 교회의 흔적 등이 64년에 순교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편지의 저자로 인식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여긴다. 저작 시기는 아무래도 1세기 말엽으로 추정하는 게 옳다. 그때 교회는 제도화되어 갔고, 그때 교회는 이러저러한 문제들로 시끄럽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전해 주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해석과 그 실천의 갈등은 공동체가 갈라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 갈등을 통해 교회는 이른바 ‘신앙적 정통성’을 다져가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갈등이 생길수록 공동체를 여지없이 짓밟고 무너뜨리는 것이 있으니, 돈이다. 공동체의 파괴는 교조주의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 신념과 사상, 그리고 교조적 가르침은 구성원의 격론과 논쟁으로 대개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정리되고 정향되곤 한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시대를 떠나 인간의 실질적 문제는 ‘돈’과 그 ‘돈’으로 인한 ‘차별’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역시 비켜갈 수 없다. 그야말로 살아 꿈틀거리는 공동체의 민낯, 그 자체가 돈의 문제로 불거지고 드러난다.

 

야고보서는 ‘경제적 갈등’을 정확히 겨눈다. 상인과 부자에 대한 직접적 비난은 물론이거니와 공동체 내부에 서로 다른 계급의 처지에 무감각한 이들에 대한 비판 역시 날카롭다. 야고보서는 ‘형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강조하는 데 있어 ‘형제’는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고아와 과부(1,27), 헐벗고 배고픈 이들(2,15-16)을 살피는 형제애의 실천을 야고보서는 강조한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외침(2,17)은 제 계급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다른 계급의 처지를 살필 줄 아는 개방적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러나 ‘부자’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건네는 장면은 야고보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부자’는 ‘형제’가 될 수 없다. 야고보서는 가진 자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나 견유주의나 스토아 학파가 주창하는 물질로부터의 해방이나 절제 차원에서 가난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가난은 함께 사는 세상에 서글픈 외로움을 한없이 부추긴다. 그 가난과 대척점에서 무소유의 삶을, 혹은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는 이들이 내뱉는 ‘가난하더라도 힘내라.’, ‘노력하면 부자된다.’는 식의 약팔이 선동은 가난을 더욱 아프게, 서글프게,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릴적 가난의 체험은 꽤나 버거운 것이어서 어른이 되어 고만고만 살게 되더라도 가슴 속 깊이, 자국이 움푹 패인 상처로 늘 남아있게 마련이다.

 

가난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는 제 ‘노-오-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가난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다. 사회 구성원의 재화에 대한 경쟁과 그로 인한 부의 불균형한 분배의 결과가 가난이다. 경쟁은 공정할 수 없다. 태어난 집안이 다르고, 집안이 다르면 교육의 환경도 다르고, 교육의 환경이 다르면 인생의 환경이 너무나 달라진다. 경쟁의 공정은 사실 거짓말에 가깝다. 경쟁에서 뒤쳐지면 사회적 시스템을 문제 삼기 전에 개인적 ‘욕망’에 휘둘릴 때가 많다.

 

‘나도 부자되고 싶다.’, ‘나도 잘 살고 싶다.’, ‘그런데 현실이 너무 힘들다.’ 등등의 말로 지금 제 처지를 한탄하고 만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부자되고픈 욕망’은 가난의 거부가 아니라 가난으로 더 가난해져 결국엔 가난 속에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길을 걷고 만다. 역설적이지만 야고보서는 ‘부자’의 모습에서 가난과 파멸의 무지한 욕망을 인식한다.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야고 1,9-11)

 

가난함을 내버려둔 채,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예수님만 믿고,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자조 섞인 체념의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실 신앙이란 부유함을 지향한다. 정신적이고 감성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형제들 안에서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부유함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신앙은 견지하고 촉구한다. 나누지 않는 개인적 욕망을 야고보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그리고 이렇게 경고한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여 사회를 제 이익을 얻기 위한 싸움터로 인식하는 이들, 그들은 제 삶과 필연적으로 더불어 함께 사는 다른 삶에 배타적이고 대립하여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야고 1,8 : ‘두 마음을 품은’은 그리스어 ‘딥푸코스(διφυχοϛ)'로, ‘갈라진 마음’을 가리킨다.) 욕정은 나와 타인, 나와 사회를 갈라놓고 사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형제 안에서, 특별히 아픈 이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다.(야고 5,13-17)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 자비의 강함을 보여주는 게 교회 공동체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야고 2,13) 신앙이 제 처세를 통한 인생 꾸미기의 도구로 타락한 오늘날, 영성이 안락한 제 인생의 액세서리로 전락한 오늘날, 가난한 이는 여전히 아프고 힘들며 부자는 여전히 허황된 욕망 안에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폐기한다.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여전히 외치고 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월간빛, 2021년 6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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