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 사도들의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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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10-05 | 조회수3,265 | 추천수0 | |
[구역반장 월례연수] 사도행전 - 사도들의 이야기
‘사도행전’은 ‘루카 복음서’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 저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일한 저자가 쓴 책인데 왜 한 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사도행전(18,300여 단어)과 루카 복음서(19,400여 단어)는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도 분량이 가장 많은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기원 후 75~90년경, 루카 복음서는 이보다 앞선 70~80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는 책을 만들 때 파피루스에 필사하였으므로 하나의 두루마리에 모두 담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은 각각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루카 복음서)와 ‘사도들에 대한 이야기’(사도행전)이기도 하고, 주제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루카 복음서)과 ‘초대 교회가 설립된 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사도행전)으로도 엮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권은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구약)을 접하던 당시, 히브리인들은 성경의 구조를 크게 세 부분 ‘모세오경, 예언서, 성문서’로 분류하였고, 이후 70인역(LXX)은 네 부분 ‘모세오경, 역사서, 시서 및 지혜서, 예언서’로 분류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약 성경도 70인역의 분류에 따라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수록되었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다루고, 신약의 ‘사도행전’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역사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초대 교회의 선교 활동으로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반부(1~12장)에서는 주로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가, 후반부(13~28장)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활약상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내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전반부에도 ‘마티아를 유다의 빈 자리 대신 사도로 뽑은 이야기’(사도 1,15-26), ‘일곱 봉사자를 뽑은 이야기’(사도 6,1-7), ‘스테파노가 첫 순교자가 된 이야기’(사도 6,8-7,60), ‘바오로의 회심 이야기’(사도 9,1-19) 등 다른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단순히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야기로 나누기보다는,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전반부),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후반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라는 말씀처럼 지리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이방인의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으로 구분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들의 삶을 묵상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사도행전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사도들의 행적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 번째 기적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사도들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은 금전적인 자선을 청하는 불구자에게 베드로가 은도 금도 없지만 그보다 더 귀한, 즉 3년간 동고동락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걷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사도 3,1-10 참조).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사도 4,12)은 치유와 구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사도들은 이 “이름”(사도 5,41)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또 신자들은 이 “이름”(사도 2,38)으로 세례를 받고, 이 “이름”(사도 9,14.21;22,16)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이 기적들을 가능하게 해 주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믿음’(사도 4,10.30 참조)입니다.
구약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불경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주님(아도나이)’이나 ‘그 이름’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사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사도 5,41)고 기뻐했을 때, ‘그 이름’은 ‘하느님’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하며 기적을 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분께서 ‘하느님’이심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이 교회를 통해 지속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던 하느님의 구원 권능이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작용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 번째 치유 기적을 바라보면서, 오늘날 우리도 물질적 재화나 사회적 성공을 갈구하며 살지만, 참된 행복으로 가는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에 있음을 묵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도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변모
사도들의 ‘믿음’이 처음부터 출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하고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신 직후에도, 길에서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로 싸웠는지 물어보셨지만,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하찮은 일로 다투었으므로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마르 9,33-37; 마태 18,1-5; 루카 9,46-48 참조).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당신이 영광의 옥좌에 오르실 때 그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수 있도록 출세를 청탁했으며, 다른 열 제자는 그 모습을 불쾌하게 여기며 서로 세상적인 자리 경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마태 20,20-28; 마르 10,35-45; 루카 22,25-27 참조).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고뇌에 싸여 피땀을 흘리며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던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마태 26,36-46; 마르 14,32-42; 루카 22,39-46 참조). 더군다나 베드로는 체포되신 스승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카 22,55-62; 요한 18,15-18 참조).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무서워하며 떨고 있었습니다.(요한 20,19 참조)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르 14,50 참조). 이전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을 때, 그분께서는 세상적인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청년은 그럴 수 없어 그분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청년과 대조적으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순간, 예수님을 도와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렇듯 사도들은 겁 많고 욕심도 많으며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했던 사도들이 ‘성령 강림’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주셨고(요한 20,22 참조), 또 오순절에 불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내려앉아 성령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사도 2,1-4 참조). 그리하여 사도들은 목숨까지 바치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인간적인 한계와 변모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새로운 출발도 자신의 내적 결심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 성령을 통해서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로운 변화와 결단을 위해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토마스의 고백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하고 의심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가 우리보다 앞서 인간적인 의심을 드러내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위안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보게 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이렇게 절절하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이는 토마스가 유일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한 장면도 함께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시고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라고 크게 칭찬하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은 인간적인 의심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쏟아내는 토마스의 고백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의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의심을 넘어 굳센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부르심
우리가 사도들의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묵상할 것은 예수님께서 특출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부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처럼 ‘일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금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주시는 이야기임을 생각해 볼 때,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일상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미사와 성찬례를 통해, 기도를 통해, 이웃을 통해,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마음을 열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것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일상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친교를 맺고자 하는 부르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을 하늘로 들어올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위해, 욕심에서 벗어나 영적인 감수성을 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어떻게 온 세상에 퍼뜨리게 되었는지 사도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초대 교회의 발자취를 살펴보았습니다. 온 세상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해야 할 선포 사명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사도들의 삶과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본질 중 하나는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물질적인 것을 향한 마음을 들어내고 참된 행복,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 참사랑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안에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도들의 후예이고, 복음 선포의 사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난 하느님을,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앙을 삶의 자리에서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눈뜨도록 해 주는 신앙의 삶을 살고 증거하고 선포해야 함을 깊이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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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1년 10월호, 정순택 베드로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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