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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티로와 프톨레마이스, 3차 선교 여행 때 거쳐 간 마지막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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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11 조회수2,236 추천수0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티로와 프톨레마이스, 3차 선교 여행 때 거쳐 간 마지막 도시들

 

 

- 오늘날 티로의 해안 풍경(BiblePlace.com)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남부 파타라에서 페니키아로 건너가는 배를 만난 바오로 일행은 그 배로 옮겨 탑니다. 배는 키프로스 섬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티로에 도착합니다. 배가 티로에서 짐을 내리기로 돼 있었던 것으로 보아(사도 21,3), 바오로 일행이 탄 배는 상선이었을 것입니다.

 

티로에 도착한 바오로 일행은 제자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머무릅니다. 티로 신자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거듭 만류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그들과 작별한 후 일행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티로를 떠나 프톨레마이스에 도착해 항해를 마치고 그곳 형제들과 하루를 함께 보냅니다(사도 21,4-7).

 

 

이방인의 도시이자 예수님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던 티로

 

오늘날 레바논 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 티로는 북쪽으로 50㎞가량 떨어진 시돈과 함께 고대 세계에서 페니키아 또는 시리아-페니키아라고 불리던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로 여호수아기를 비롯해 열왕기, 역대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요엘서, 에제키엘서, 마카베오기 등 구약성경 곳곳에서 언급됩니다.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 지방의 강력한 해양 도시 국가로 세력을 떨치던 티로는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해 그리스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티로는 해안가의 구도시와 맞은편 섬에 조성된 신도시로 이뤄진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섬과 뭍을 연결하는 긴 둑을 쌓아 마침내 티로를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그리스가 로마 제국에 멸망한 이후 티로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티로는 풍요와 폭풍우의 신 바알, 어린이들을 희생제물로 바치게 하는 신 몰록 같은 가나안의 토속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강아지도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는다’고 말한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곳이 바로 티로였습니다(마르 7,24-30).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실 때 예수님께 몰려온 군중 가운데는 티로 지역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르 3,8; 루카 6,17).

 

바오로 일행이 티로에 도착해 제자들을 찾아냈다는 것은 티로에는 이미 신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바오로와 일행이 알고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 신자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았을 때 흩어진 형제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믿게 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티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장해 갔습니다.

 

- 로마 시대 주랑이 있는 티로의 옛 보도(좌), 하늘에서 내려다본 프톨레마이스(아코) 항구(우)(BiblePlace.com)

 

 

그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 때 일어난 그리스도교 박해로 티로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마인들은 2세기에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전차경기장을 티로에 건설했는데, 500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녀 크리스티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데키우스 황제(재위 249~251) 때도 박해가 있었는데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교부 오리게네스(185~253)가 이 박해로 모진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253년 티로에서 숨을 거둡니다.

 

박해가 끝나면서 티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시 성장했으나 7세기에 무슬림의 지배를 받으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2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잠시 되살아납니다만, 곧이어 무슬림의 지배를 받습니다.

전차경기장을 비롯해 로마 시대의 유적들로 가득한 티로는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오늘날 관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을 치유해 주신 곳이자 바오로 사도가 일주일 동안 머문 성경의 도시로서 남아 있습니다.

 

 

십자군의 유적으로 더 알려진 아코

 

바오로 일행이 항해를 마친 프톨레마이스는 티로에서 남쪽으로 40㎞가량 떨어진 항구 도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아코(여호 19,30; 판관 1,31)로 언급되는 프톨레마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 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에 프톨레마이스로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티로가 시리아 페니키아를 대표하는 항구 도시였던 것처럼 프톨레마이스는 한때 팔레스티나를 대표하는 항구 도시였습니다만,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2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아코 남쪽에 새로운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를 건설한 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 이방인 도시에 언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바오로 일행이 프톨레마이스에서 형제들을 만나 인사한 것으로 보아 이 도시의 형제들 역시 티로의 제자들처럼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진 신자들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믿게 된 제자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스의 공동체는 크게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 카이사리아 고대 항구 유적(BiblePlace.com)

 

 

카이사리아에 밀려 지내던 프톨레마이스는 7세기에 아랍인들이 이 일대를 점령하면서 아코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팔레스티나를 대표하는 항구 도시로 성장합니다. 12세기 말 십자군이 아코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아코는 유럽에서 배를 타고 성지순례를 오는 순례자들이 팔레스티나로 들어가는 길목 역할을 하며 약 100년 동안 번창합니다. 그러나 13세기 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다시 이슬람 세계의 지배를 받습니다. 19세기 중엽 영국군에 점령된 아코는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이스라엘 최북단의 항구 도시가 됩니다.

 

프톨레마이스 곧 아코에서 하루를 묵은 후 이튿날 카이사리아로 내려간 바오로 일행은 그곳에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인 필리포스의 집에서 여러 날 머뭅니다(사도 21,18). (카이사리아에 관해서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9월호를 참조하십시오) 이때 유다에서 내려온 하가보스라는 예언자가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말에 카이사리아의 제자들뿐 아니라 바오로의 일행도 모두 나서서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도록 간곡히 권유하지요.

 

하지만 바오로는 티로에서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습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바오로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사람도 함께합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오로 일행은 그곳 형제들의 환대를 받으며 3차 선교 여행을 마칩니다(사도 21, 8-16). 학자들은 바오로의 3차 선교 여행이 53~58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만 5년에 이르는 긴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침은 새로운 시작의 예고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5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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