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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오늘 복음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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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승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19 조회수576 추천수2 신고

마태오 복음 10,34-39의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강론을 준비하면서 묵상한 내용을 조금 나눠 드릴까 합니다.

마태오 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따라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열 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박해를 각오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할 것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한 말씀 가운데에 10,34-39의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단호한 선택이 요구됩니다. 그 선택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과 비교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 아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도, 딸과 어머니도 그리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그러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일치와 평화의 관계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따라 나서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혈연의 관계에 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더 온전한 일치를 위하여 이제 분열될 대상들이 있을 것인데, 그 대상들이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 열 두 제자를 비롯하여, 온 삶을 봉헌하여 주님을 따르기로 서약한 이들에게 이 말씀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일 것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표현때문에 우리는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갈라짐, 원수"는 상대적인 용어이며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에게 있어서 최상급의 존재이셔야 하기에 복음사가에 의하여 그러한 표현까지도 나올 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쓰여졌던 시기를 고려한다면, 실제로 신앙 때문에 가족이 분열되는 예들도 있었기에, 하느님과 신앙을 선택하도록 복음사가는 강한 필치로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 가족 간에 분열을 가져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과 복음사가가 그 시대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겨야 할 대상들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자기 십자가"에 해당하는 분열도 받아들여야만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추종에는 "칼과 갈라짐"으로 표현될 수 있는 "포기"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기에 오늘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아멘.

 

아래의 내용은 제가 2006년과 2005년에 했던 강론의 원고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2006. 7. 17.)

(독서: 이사 1,10-17; 복음: 마태 10,34-1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말씀으로 당신의 오심이 분열의 원인이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또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인간적인 평화가 아닌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완전하게 주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반대 받음이 있고, 무시당함이 있으며, 분열된 모습조차 받아들여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이끄는 힘을 가져다줍니다. 하느님의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는 단순히 자신의 안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도 사랑을 살게 하는 에너지를 우리에게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마저도 때로는 서로 이해하지 못할 때조차 있겠지만, 참된 신앙은 결국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일치하게 해 줄 것입니다.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상충될 때, 우리는 분열될 수밖에 없겠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통해서 듣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삶 또한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예상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십자가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참된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그 평화, 그 구원을 우리가 언제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구원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주리라.”(시편 50,23b) 아멘.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2005. 7. 11.)

(독서: 출애 1,8-14.22; 복음: 마태 10,34-1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오심이 세상적인 평화와 반대의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반대받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아직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

사랑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팽배해 있는 “적당히”라는 용어로 대변될 수 있는 타협 안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도 쉽게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적당히 정직하고,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죄도 지으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자 하는 우리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시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세례 때 이미 우리가 고백하였듯이 세속과 육신의

간교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귀와 악의 세력을 끊어버릴 것을 우리

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물론 나약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선한 지향을 가지고서도 때때로 악의 세력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 중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로 걸어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보다 겸손되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

하고 이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지향으로 사느냐”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의 모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될 것입니다. 때론 박해와 반대를

받게 되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하느님만이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될 것

입니다. 우리에게 참 평화와 생명을 주시는 분은 다른 세상적인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지향이 온전히 주님께로 향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도다.”(시편 123,8a)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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