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예수를 심판한 대사제 가야파(카야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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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5,583 | 추천수0 | |
[성서의 인물] 예수를 심판한 대사제 가야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불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다교 지도자들은 위험을 느끼며 전전긍긍했다. 사실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믿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유다교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대사제인 가야파는 서둘러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예수님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위험인물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가야파는 막강한 의회의 권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대사제는 산헤드린 의회의 의장과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지도자였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은 사실상의 국가적 구속력을 갖는 회의였다. 회의를 주재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가야파였다.
대사제는 본래 종신직이었으나 대사제의 편중된 세력을 경계한 로마 정부가 임기를 제한하고 임명 제도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면서 제관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나고, 대사제는 로마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버리는 정치가로 전락해 버렸다. 로마의 통치 하에 대사제는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유다 민중을 괴롭혔고 또 성전은 재산 축재의 사유물이 되어버렸다. 정치 지도자들은 종종 자신의 욕심을 공적인 권력과 명분을 이용해서 채우려 한다. 여기서 의회란 산헤드린 의회를 말한다. 산헤드린 의회 구성원은 제사장, 바리사이파, 서기관, 사두가이파, 백성의 원로들로 구성된 71명으로 유다인의 최고기관이다.
"여러분 예수의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모든 백성이 그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유다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로마인들과 마찰을 빚을 것이고, 로마인들은 여러 정치적 구실을 들어 우리 유다교를 박해할 것입니다. 어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는 분명히 위험한 인물이지만… 백성들의 인기도 높으니 섣불리 손댈 수는 없을 텐데…"
회의 벽두부터 가야파의 각본대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대개 이런 회의는 철두철미하게 준비되기 마련이다. 회의는 요식 행위일 뿐이었다. 회의가 열기를 더 할수록 예수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을 때 가야파는 속셈을 드러냈다.
"이제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백성 모두가 다치는 것보다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가야파는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한 사람을 희생하여 나라 전체를 살리자는 논리를 펴나갔다. 가야파는 이미 대사제의 직분을 잃고 스스로 정치꾼이 되어 있었다. 그의 결정적인 잘못은 진리보다는 피해를 보지 않고 더 많은 이익을 보겠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사제의 직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들은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 많은 이익을 우선해서 진리를 배척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러한 회의 분위기에서도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더 극렬하고 무조건적으로 행동을 불사한다.
"옳소! 어서 끌어다 재판을 받게 해서 사형에 처합시다!"
"그럴 순 없소. 완전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는 기다립시다."
소수의 신중론도 있었지만 이런 강경한 분위기에서는 금방 묻혀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피해를 두려워하며 침묵을 고수한다. 사실은 대다수의 침묵자는 죄악의 동조자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죄악을 꾸미고 행동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불의를 보고 그냥 눈을 감는다면 그건 죄악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은 가야파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 후 자신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심판하고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건에서처럼 다수결의 원칙에 의한 결정이 항상 진리는 아니다.
가야파의 결정은 비록 정치적이나 세속적으로는 인정될 지 몰라도 신앙의 차원에서는 아주 그릇된 것이었다. 가야파와 당시의 유다교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강한 세속의 유혹과 늘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교회는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설사 교회의 위험이 닥치더라도 진리를 포기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평화신문, 2001년 10월 2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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