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풍속을 시작하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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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670 | 추천수0 | |
[성서의 풍속] 성서의 풍속을 시작하면서 …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성당에서 친구들과 함께 성서를 공부한다고 모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특한 일이다. 물론 우리에겐 성서공부 교재도 없었고 성서를 가르쳐 줄 지도자도 없었다.
우리가 고작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약성서 한 권씩 들고 와서 무작정 읽는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 읽었던 부분이 공교롭게도 최인호 선생이 ‘나코 복음’이라 이름 붙인 마태오 복음 1장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으며 …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
성서에는 두 장이나 빼곡히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만 씌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읽다 곧 지치고 말았다. 한 친구가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게 뭐야, 뭐 이렇게 낳고 낳고 밖에 없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우리의 성경공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도대체 성서가 너무 어려워서 재미를 못 느꼈던 것 같다. 마태오 복음 서두의 족보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건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였다.
우리가 읽는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지리, 풍습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성서를 읽고 묵상할 때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많다. 우리는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아주 이해하기 어렵다(마태오 복음 13장 참조). 우리의 생각에 농부들은 먼저 쟁기로 땅을 갈고 그 다음에 씨를 뿌린다.
그에 반해 성서에 나오는 농부는 쟁기로 갈지도 않고 그냥 씨를 뿌린다. 당시에는 쟁기의 날이 밭고랑을 갈 정도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흙 위에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대의 씨 뿌리는 농부는 흙을 갈아서 씨를 뿌리지 않았다.
농부는 어디에 씨앗이 뿌려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씨앗은 가시덤불, 혹은 돌밭에 뿌려지기도 했다. 토양의 성질은 나중에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비유는 우리가 말씀을 뿌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또한 곡식을 맺을 수 있는 모든 땅에 희망을 갖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우리와는 현저하게 다른 사고 방식이나 생활 습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와 민족, 사회와 전통적인 풍습, 관례 등이 너무 달라서 낯설기조차 하다. 지리적인 위치와 기후 등과 같은 자연의 조건들도 성서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또한 성서는 이미 수 천년 전에 기록된 글이다.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 시대의 풍속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서를 연구할 때 단어 사전 못지않게 풍물 사전도 필요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성서 시대의 풍속을 아는 것은 성서 공부를 더 재미있게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성서의 풍속을 통해 독자들이 성서에 흥미를 느끼고 성서를 이해하는 데 조그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시작한다.
[평화신문, 2002년 10월 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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