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벌꿀처럼 달콤한 하느님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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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667 | 추천수0 | |
[성서의 풍속] 벌꿀처럼 달콤한 하느님 말씀
벌꿀은 인류가 자연에서 얻은 초기 식품이다. 그래서 벌꿀은 신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인류가 벌꿀을 이용하게 된 것은 적어도 5000년 이전으로 추측한다.
옛날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신을 젖먹이 때 꿀로 키웠다고 해서 꿀을 신들의 음식으로 생각했다. 인도 신화에서도 경건한 사람들의 생기를 되살리는 벌꿀의 샘이 등장한다.
이처럼 벌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음식이다. 로마인들도 벌꿀을 일종의 '만나'라고 생각하며, 우주의 나무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이슬과 같은 신비스러운 것이라 표현했다.
그 후 인류사회에서 꿀은 시신 방부제, 미이라 제작, 과실 보존 등에 사용했다. 또 옛날부터 꿀벌이 만들어낸 신비한 꿀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였다.
심지어 꿀에는 악령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악마를 쫓는 능력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스파르타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벌꿀을 사용했다.
또한 옛날 사람들은 벌집에서 꿀벌이 만들어 놓은 꿀을 채취할 때마다 꿀벌 무리의 삶 방식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꿀벌은 공중을 나는 동물 중에서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꿀벌 사회는 인간이 모방할 만한 모범적 사회라고 생각했다.
또 꿀벌은 날짐승 중에서 가장 작지만 그들이 만드는 음식은 으뜸으로 보았다(집회 11,3 참조). 꿀벌은 성실한 사람의 모범이고 힘은 약하지만 놀랄 만한 재주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인정받았다.
가장 오래된 수메르 상형문자에서는 왕을 나타내는 기호를 꿀벌 형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집트 초기 왕조의 지배자들은 '꿀벌의 임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고대 민족에게 있어서 꿀벌은 치료약이며 신비로운 음식이고 죽음과 부패 속에서도 죽지 않는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구약성서에서도 벌꿀은 생명과 은총을 상징했다. "이 백성은 내가 기름진 밀가루로 먹이고 바위에서 따낸 꿀로 배불리리라"(시편 81,16 참조).
여기서 꿀이란 사람이 하느님을 통해 얻는 은총과 행복을 상징한다. 하느님 은총과 구원 효과는 마치 꿀처럼 달콤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에서는 하느님 말씀이 자주 감미로운 꿀에 비유된다.
"당신의 약속은 말부터가 혀에 달아 내 입에는 꿀보다도 더 답니다"(시편 119,103 참조). 꿀이 몸에 이로운 것처럼 하느님 말씀도 인간 영혼에는 맛있고 달다고 표현한 것이다.
"내 아들아, 꿀은 좋은 것이니 먹어 두어라. 송이 꿀은 입에 다니 먹어 두어라. 지혜도 네 영혼에는 그와 같은 줄 알아라. 지혜를 얻으면 앞날이 열리고 희망이 끊기지 아니하리라"(잠언 24,13-14 참조).
또 꿀은 하늘에서 내려준 음식으로 인간의 내적 눈을 연다고 생각했다(1사무 14,27 참조). 그러므로 광야에서 지냈던 세례자 요한이 들꿀을 먹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마태 3,4 참조).
초대교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꿀이 방울져 떨어지는 바위나 새로운 낙원의 꿀이 흐르는 강으로 표현했다. 또한 부활 신비를 꿀을 가득 채운 '벌집'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 의하면 하느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벌집', 즉 부활 은총을 거룩한 교회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맛본다고 가르쳤다. 사도시대 이후 전통에서 벌꿀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구원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설교를 벌꿀에 비유하기도 했다.
우리가 오늘날 미사에 참여해서 하느님 말씀과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할 때 마치 벌꿀을 먹는 것처럼 우리 영혼에 달콤한 음식이 되어 우리 마음이 행복하고 기쁨에 넘치는지를 한번 깊이 묵상해보자.
[평화신문, 2004년 3월 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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