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가라지를 뽑기가 왜 힘든가요?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욥기 - 하느님의 특별 지도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833 | 추천수0 | |
[성서의 풍속] 가라지를 뽑기가 왜 힘든가요?
- 한 알의 밀알, 1987년, 유리화, 이남규, 동정성모회 경당. 자료제공 = 정웅모 신부.
신학생 시절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경기도 용문 근처로 여름 농촌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첫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벼 사이에 나는 잡초인 피를 뽑는 일이었다. 우리가 맡은 논은 피를 뽑는 시기가 늦어져서 이미 피가 무럭무럭 자란 상태였다. 우리는 논에 다니면서 손으로 하나하나 피를 뽑았다. 그런데 잠시 후 동네가 떠나갈듯 논 주인 할아버지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쳤다. "이 OO놈들, 너희들! 내 농사 망칠 셈이야?" 학생들이 피와 벼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벼를 마구 뽑은 것이었다. 봉사활동 첫날부터 학생들은 논 주인 할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잘 자란 잡초를 벼로 착각했던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 땅과 자연의 신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파종과 수확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겨울에 모든 것이 다 죽은 것 같았던 척박한 땅에서도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생명의 싹이 움터나온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삭'이라는 말은 밭에서 나는 씨를 나타낸 동시에 인간 태내에서 나오는 생명의 씨를 의미했다고 한다. 이처럼 씨는 이미 생명을 내포하고 있다. 씨는 싹을 내고 자라서 퍼지지만 그 과정은 참 신비롭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마르 4,27-28 참조).
예수님 비유 말씀에 밀과 가라지가 나온다. "제자들이 와서 '그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하고 청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마태 13,36-40).
밀은 소맥 또는 빵밀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주식은 밀이다. 주로 온대 지방 밭에서 재배되는 밀은 세계 최고 생산량을 유지하는 곡물로 세계 인구 반 가까이가 주식으로 삼고 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도 대부분 밀을 함께 먹고 있다.
가라지란 밀밭에서 자라는 일종의 잡초로 열매에 독이 있다. 문제는 이 가라지가 밀 이삭이 달릴 때까지 밀과 너무도 닮아서 쉽게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중동 지방에서는 원수를 갚는 수단으로 원수의 밀밭에다 몰래 가라지 씨를 뿌려서 밀농사를 망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무성히 자라는 가라지를 발견하고 뽑으려는 일꾼에게 가라지로 인해 밀이 뽑힐 위험이 있으므로 같이 자라도록 내버려두게 하신다.
초대교회는 이 밀알을 하느님 나라 발전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중세시대에는 밀알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밀과 가라지의 교훈은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이고,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내 안에서도 선과 악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악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선과 너무도 흡사해서 사람을 속인다. 악은 항상 선으로 위장하고 있다.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현세에서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신비를 묵상한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시에 우리도 남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평화신문, 2004년 9월 19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