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인신 공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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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5,953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인신 공양(人身 供養)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느님에게서 끔찍한 명령을 받는다(창세 22장).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배려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아들을 얻는다.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이사악을 잡아서 당신께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요구이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고향에서 친척들과 함께 잘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불러내셨다(창세 12,1-2). 아브라함은 오직 하느님만 믿고 미지의 세계로 나가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분께서는 과연 아들까지 주신다. 그런데 이제 당신의 약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요구를 하신 것이다. 큰 민족을 약속하셨으면서, 그 약속을 실현할 씨앗을 없애라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그 지시에 따른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신앙의 시험을 받고 그것을 아주 훌륭히 통과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과 강조점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다. 그런데 이 일화의 배경은 신령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다. 우리말에서는 아직 뚜렷한 용어로 정착되지는 않았지만(영어의 human sacrifice, 독일어의 Menschenopfer 등 참조), '인신 공양'이라는 말이 그중 나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인신 공양은 수많은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관습이다. 심청전, 여러 지방에 다양한 형태로 퍼져있는 이무기 또는 구렁이 전설, 또 '에밀레종' 이야기 등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인신 공양이 이땅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뜻한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단순히 야만적 행동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그것은 미개한 종족들은 물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중국과 인도, 로마와 그리스, 잉카를 비롯한 중남미의 여러 문화권, 한마디로 모든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도 행해졌던 관습이다.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서도 이 인신 공양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 연합군의 지속적 공격으로 절망에 빠진 모압 임금은 왕세자로 책봉된 맏아들을 성벽 위에서 불살라 자기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대는 이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어떤 종교적 공포에 사로잡혀 철수하고 만다(2열왕 3,27).
더 옛날, 왕정 이전의 판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기원전 1100년 경), 이스라엘에서도 놀라우면서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판관 11장). 이스라엘인들은 막강한 외적의 침입에서 자기들을 구해달라는 청과 함께 입다라는 사람을 판관으로 추대한다. 그런데 이 입다는, 아마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짜낸 궁여지책으로, 자기가 침략군을 무찌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자기를 맞으러 집에서 처음 나오는 사람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한다. 그런데 그의 외동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맨 먼저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맹세를 돌이킬 수는 없는 일. 입다는 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한 아픔 속에서 딸을 제물로 바친다. 이 슬픈 이야기는 실제라기보다, 여러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민간 설화를 이스라엘식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아무튼 이 일화의 주안점은 이러한 인신 공양이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비정상적이고 특수한 사건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20장을 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나온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에 대한 배신과 반역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또 그들에게 좋지 않은 규정들과 지켜도 살게 하지 못하는 법규들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아들들을 불속으로 지나가게 하면서 나에게 바친 그 제물들로써, 나는 그들을 부정(不淨)하게 만들었다"(20,25-26). 여기의 "규정"과 "법규"는 맏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법을 가리킨다(탈출 13,2; 22,29). 하느님께서는 이 법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첫아들을 제물로, 그것도 산 채로 불속을 지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당신께 바치도록 만드셨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하실 수 있는가?
하느님의 "규정"은 본디 좋은 것이며, 그분의 "법규"는 사람을 잘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좋지 않은 규정과 지켜도 살게 하지 못하는 법규들을" 주실 수 있는가?
우선 아이들을 불속으로 통과시켜서 산 채로 신에게 바치는 인신 공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띠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지중해 전역에 걸쳐 활발한 해상 무역을 하던 페니키아인들이, 특별히 이런 식의 어린이 인신 공양 제사를 거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식민지로 한때 로마 제국과 쌍벽을 이루었던 서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는 이 제사의 잔재로 생각되는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 자기들의 국가 신에게 주로 귀족 집안의 남녀 어린이들을 불에 살라 바쳤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어린이 인신 공양이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곳에서 주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곧 남부 유다 왕국 아하즈 임금 시대(기원전 735-716년?), 예루살렘 성을 남쪽과 남서쪽으로 둘러싼 벤-힌놈 골짜기의 도벳이라는 곳이다(2열왕 16,3; 23,10. 전통적으로 이 제사를 ’몰록’에게 바친다고 번역되지만, 이 ’몰록’이 신의 이름인지 제물의 명칭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하즈는 이스라엘 종교의 순수성을 크게 해치는 이교의 경신례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2열왕 16,3-4.10-18). 게다가 페니키아만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민족도 바치는 이 끔찍한 제사까지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아하즈 임금은, 아마도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의 침략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아들마저 희생시킨다(2열왕 16,4-5). 그의 손자 므나쎄 임금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우상 숭배자이다(2열왕 21). 그 역시 짐작컨대 대제국 아시리아의 침공이라는 위협 속에서, 할아버지의 본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속으로 지나가게 한다(2열왕 21장). 비슷한 시기에 북부 이스라엘 왕국에서도 이러한 어린이 희생 제사를 거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2열왕 17,17).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이 인신 공양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아하즈와 므나쎄 임금 시대의 사제들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레위기에 따르면, 그러한 짓을 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18,21; 20,2-5). 신명기도 그것을 하느님께서 싫어하고 역겨워하시는 짓이라고 가르친다(12,31; 18,10). 유다 왕국의 왕정 시대 말기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이 제사가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거행되는 계곡을"살륙의 골짜기"라고 부른다(7,31-32; 32,35).
위에서 인용한 문제의 구절(에제 20,25-26)을 선포한 에제키엘 역시 그러한 비인간적인 행위를 명백한 어조로 단죄한다(16,20-21; 23,39). 그렇다면 어째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마치 인신 공양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가? 이스라엘에서도 맏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탈출 13,2). 그리고 첫아들을 직접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가축이나 금전으로 대속(代贖)해야 한다는 것도 확실하다(탈출 13,13; 민수 18,16). 그런데 전쟁 같은 국난의 때에는, ’맏아들 봉헌을 말 그대로, 곧 다른 민족들이 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곧 위난의 때에는 하느님께서도 인신 공양을 바라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짓을 역겨워하시는 하느님을 왜곡시키는 일이요, 그분에 대한 뒤틀린 순종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에제키엘은 백성의 이러한 생각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백성의 그릇된 순종, 곧 불순종 때문에 그들에게 불행이 닥쳤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모든 맏아들은 맏물과 맏배처럼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 더러는 입다 판관의 경우처럼 무지한 상태에서, 더러는 아하즈 임금처럼 이민족들의 영향 아래, 맏아들이나 다른 자식들을 번제물로, 또는 불속을 통과시킴으로써 하느님이나 다른 신에게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신 공양은 하느님의 백성에게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상적인 종교 의식으로 거행된 적이 없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만행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들은 경신례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절망적인 상태에서는 심지어 이런 생각마저 들 수 있다.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자애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경향잡지, 1998년 8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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