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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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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3,53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자선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주는 이!

 

마태오 복음 5-7장은 ‘산상 설교’라고 불리는 단락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오고 있는 말씀이다. 위의 인용구는 이 설교의 가운데 부분인 6장의 1-4절이다. 이러한 자리에 배치된 자선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시대에 자선이 중요한 덕으로서 많이 실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자선은 구약성서에서부터 이미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장려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구약성서가 쓰인 히브리 말에는 ‘자선’에 해당되는 낱말이 없다. 그러면서도 율법서, 예언서, 지혜서, 시편 등 구약성서의 도처에서 가련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우선,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이 가장 중시하던 율법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여러 가지 조치가 마련되어 있다. 출애 23,10-11과 레위 25,1-7의 규정에 따르면, 일곱째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곡식밭이든 포도밭이든 올리브나무밭이든 모든 농토를 놀려야 한다. 이 안식년에 저절로 소출되는 것은 먼저 가난한 이들이 차지하고 거기에서 남는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이 안식년에는 또 그 동안 꾸어준 것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신명 15,1-6).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성전에 바치게 되어있다. 그런데 매세번째 해에는 그 십분의 일을 자기가 사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내놓아야 한다(신명 14,28-29; 26,12-13).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은 수확에 관한 법규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곧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도 안되고 거두다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되며, 곡식단을 잊어버리고 거두지 않았으면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도 안된다. 포도나 올리브를 딸 때에도 지나친 것을 도로 가서 따서는 안된다. 이 모든 것은 가난한 이들의 차지로 남겨두어야 한다(레위 19,9-10; 23,22; 신명 24,19-22. 그리고 룻 2,15-16 참조). 또 배고픈 사람은 남의 포도밭이나 곡식밭에 들어가 그릇에 담거나 낫을 대지만 않으면, 배불리 포도를 따먹거나 손으로 이삭을 잘라먹을 수 있다(신명 23,25-26). 물론 성서의 시대에도 모든 법규가 항상 잘 지켜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활짝 펴고’ 아까워하는 마음 없이 ‘반드시 주려는’ 그들의 자세를 볼 수가 있다(신명 15,7-11).

 

구약성서의 현인들은 이러한 법 규정에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신학까지 명백히 밝힘으로써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역설한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짓는 사람이고/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잠언 14,21). “죄”나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서 결정되는 사항이다. 하느님과의 관련성을 잠언 14,31은 더욱 분명히 표현한다. “약한 이를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불쌍한 이를 동정함은 그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언 17,5도 참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세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배려 없는 하느님 공경도 의미가 없다. 하느님을 위함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네 혈육(=너와 같은 인간)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가난한 이들을 돌봄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주는 이/불행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구하시리라”(시편 41,2).

 

 

자선을 베푸는 것은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구약성서 말기와 신구약의 중간기에 ‘자선’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더욱 직접적으로 강조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신약성서의 배경을 이루는 유다인들의 자선에 관한 폭넓은 생각과 활발한 실천은, 토비트가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네가 가진 것에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 누구이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네가 가진 만큼, 많으면 많은 대로 자선을 베풀어라. 네가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은 대로 자선을 베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곤궁에 빠지게 되는 날을 위하여 좋은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암흑에 빠져들지 않게 해준다. 사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비 4,7-11. 그리고 집회 4,1-6; 17,22; 29,12 참조). 그리고 라파엘 천사는 더 나아가서 자선이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고까지 말한다(토비 12,9. 그리고 3,30 참조). 죄는 하느님께 잘못해 드리는 것이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자선은 하느님께 잘해 드리는 것이다. 이 잘해 드림이 이제 공로로 헤아려지고 또 잘못한 죄를 없애주는 것으로도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선보다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공로를 중시하는 계산성이나 위험성이 부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선을 베푸는 이와 그것을 받는 이와 하느님 사이에 원을 그리며 이루어지는 생명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관계’가 신약성서에까지 이어지는 그 시대의 자선이 지니는 큰 특징을 이룬다. 성서에 자주 나오는 ‘정의, 의로움’은 추상적이고 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내가 다른 이들과 맺는 또는 맺은 관계에 충실함이 바로 정의이고 의로움이다. 내가 나보다 가난한 이웃과의 관계에 충실함은 자선의 형태로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나 의로움 또는 그러한 일이 곧 자선의 뜻을 지니게 된다(다니 4,24; 집회 7,10; 12,3). 첫머리에서 인용한 마태 6,1의 “선행”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의로움 또는 의로운 일을 뜻한다. 이 낱말이 여기에서는 2-4절에 나오는 “자선”과 일종의 동의어로 쓰인다.

 

자선은 이웃 곧 하느님께서 나와 똑같이 살과 피로 창조하신 내 “혈육”(이사 58,7)과의 관계에 충실함이다. 자선은 남는 데에서 퍼주는 것이 아니라, 물이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저절로 흐르도록 물꼬를 트는 일이다. 그렇게 흐른 물은 다시 더 높은 데에서 오는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진다.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 6,1-4의 말씀으로 자선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것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아무리 단순하게 보여도 다른 뜻이 담겨있을 수 있다. 어떠한 선행이라도 인간이 하면 거기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의도가 끼어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자선이 지닐 수 있는 이러한 위험을 경고하시면서 순수한 자선을 장려하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선에 관한 구약성서와 유다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강조하신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루가 6,38. 그리고 루가 12,33 참조).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마태 5,42) 특히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 때, 그러한 자선은 죄의 용서를 포함한 하느님의 후한 보상을 받게 된다(루가 11,41; 14,13).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마태 19,21). 예수님을 따름은 그분과 함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따름에는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포기도 자기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유다교에서처럼 기도와 금식과 함께 자선이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루는 근본 요소이다(사도 9,36; 10,2.4.31). 그리고 바로 자선을 전담시키려고 교회의 첫 ‘직무자’들을 뽑기도 한다(사도 6,1-6). 자연히 사도들도 구약성서와 예수님에 이어 신도들에게 자선을 강조하게 된다(로마 12,8.13; 1디모 5,10; 6,18-19; 야고 2,15-16). 그리고 이 때에 어려움에 처한 공동체를 돕기 위한 다른 공동체들의 조직적인 구호 활동도 시작된다(사도 11,29-30; 로마 15,26; 1고린 16,1-3; 2고린 9,1).

 

신약성서 자선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한 이들과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화에서 드러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직역: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가난한 이들은 장차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구세주의 “형제들”이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선적인 사랑’을 베푸시고,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국 하나이다. 이 사랑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실천된다. 그래서 자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적 삶의 한 면이다.

 

[경향잡지, 2000년 12월,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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