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계약 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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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8 | 조회수4,842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계약 궤
계약 궤와 다윗 부부
다윗은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다가 일차 실패한다(2사무 6장). 그는 온 이스라엘 땅에서 소집한 정병 삼만 명과 함께 장엄하게, 그러면서도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흥겹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행렬한다. 그런데 계약 궤가 실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비틀거리자, 수레를 끌던 우짜라는 사람이 그 “하느님의 궤”에 직접 손을 대는 일이 벌어진다. 그 바람에 우짜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그러자 다윗은 계약 궤가 무서운 것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다 모셔놓는다. 자기가 사는 예루살렘의 다윗성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계약 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 주님이 그의 집안에 많은 복을 내리신다. 다윗은 그 소문을 듣고 자기가 애초에 가졌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계약 궤가 무섭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직접 주님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당신 백성에게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다윗은 다시 용기를 내어 계약 궤를 옮겨온다. 그는 행렬 맨 앞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러한 다윗의 모습을 그의 ‘조강지처’인 미갈이 창문으로 내려다본다. 그리고 다윗이 궁에 돌아오자 임금으로서 점잖지 못하게 처신하였다고 비아냥거린다. 다윗은 자기가 단순한 궤가 아니라 바로 주님 앞에서 흥겨워한 것이고, 주님 앞에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미갈은 사울의 딸로 처녀 적부터 다윗을 사랑하였고(1사무 18,20), 혼인한 뒤에는 임금인 친정 아버지의 손에서 다윗의 목숨을 건져주기도 한다(1사무 19,8-17). 그런데 계약 궤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난 뒤로 “미갈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 다윗은 자기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와 죽을 때까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을 정도로 계약 궤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동 성소(移動 聖所)
계약 궤는 이 밖에도 그냥 ‘궤’를 비롯하여, ‘주님(또는, 야훼님)의 계약 궤’, ‘하느님의 계약 궤’, ‘주님의 궤’, ‘하느님의 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궤’, ‘증언 궤’, ‘거룩한 궤’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명칭이 많음은 계약 궤와 관련된 성서의 전통이 여럿임을, 또 성서의 역사에서 이 궤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한다.
계약 궤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크기는 별다르지 않다. 출애굽기 25장과 37장에 따르면, 길이가 94센티미터쯤 되고 너비와 높이가 70센티미터쯤밖에 되지 않는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귀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안팎을 순금으로 입히고 둘레에 금테까지 둘렀다. 이 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처음부터 몇 사람이 들고 나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별로 크지 않게 만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궤의 양쪽에는 운반하기 쉽도록 금고리를 두 개씩 만들어 달고, 고리에 끼워 들 수 있도록 아카시아 나무로 채를 만들어 금을 입혔다. 그리고 이 궤와 너비는 같지만 길이는 117센티미터 가량으로 조금 더 긴 판을 만들어 얹는데, 이를 “속죄판”이라고 한다. 또 속죄판 양쪽에는 거룹을 하나씩 조각하였는데, 날개로 속죄판을 덮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신명기 10,1-5에 따르면, 모세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이 궤에 안치한다. 십계명은 주님과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은 사실을 증언하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계약의 증언을 담았다고 하여 ‘증언 궤’라고도 부른다.
모세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만남의 천막” 안쪽에 계약 궤를 갖다놓는다(출애 40,21). 이로써 계약 궤가 약속의 땅을 향해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이동 성소인 성막(聖幕)의 중심이 된다.
이스라엘의 인도자
이집트를 탈출하고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계약을 맺어 정식으로 그분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광야를 행군하면서 “만남의 천막”도 함께 옮겨간다. 계약 궤가 행군의 앞장을 서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들고 출발할 때마다 모세가 이렇게 말한다. “주님, 일어나소서./당신의 원수들은 흩어지고/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은 당신 앞에서 도망치게 하소서”(민수 10,35). 그리고 행군을 멈출 때에는 (히브리 말 본문이 전승 과정에서 훼손되어 본디 어떠했는지 알기가 어렵지만, 현재의 본문에 따르면), “주님, 돌아오소서./이스라엘의 수만 군중에게로!” 하고 노래한다(민수 10,35).
이로써 이스라엘인들이 계약 궤를 주님과 거의 똑같은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이 계약 궤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 앞에 서서 그들이 위험 가득한 여행길을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 당신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계약 궤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인도자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인들이 “주님의 계약 궤와 모세가 진영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만용을 부려” 전진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참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들이 계약 궤 곧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아,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민수 14,39-45).
이스라엘인들은 계약 궤를 앞세워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넌다(여호 3장). 약속의 땅 가나안의 첫 고을인 예리고를 점령할 때에도 이 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여호 6장). 이후 계약 궤는 성서에서 언급되지 않다가 판관 시대의 막판에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1사무 4-6장). 이스라엘인들은 불레셋인들에게 싸움에서 지자, 엘리 집안이 실로 성소에서 돌보고 있던 계약 궤를 모셔온다. 불레셋인들은 소식을 듣고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저 신은 광야에서 갖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 하고 한탄한다. 그러면서도 불레셋인들이 더욱 용기를 내어 싸우는 바람에, 이스라엘인들이 패배하고 계약 궤마저 빼앗기게 된다. 불레셋인들은 계약 궤를 전리품으로 자기들의 신전에 갖다놓는데, 그들에게 재앙이 잇따른다. 그들은 일곱 달만에 계약 궤를 이스라엘인들의 지역으로 돌려보낸다.
그리하여 계약 궤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까지(시편 132도 참조), 이스라엘인들에게 거의 잊혀진 채 키럇-여아림이라는 고을에 방치된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계약 궤를 그 가장 안쪽 곧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至聖所)에 모셔놓는다(1열왕 8,1-21). 이후 구약성서의 역사서에서는 계약 궤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제5년에 이집트의 시삭 임금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였을 때에 가져가 버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임금이 예루살렘을 함락하였을 때에 성전과 함께 불에 타버렸거나 강탈당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2마카 2,4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예레미야 예언자가(예레 3,16-17도 참조) “만남의 천막”과 계약 궤를 느보 산의 한 동굴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느보 산은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올라가서 그곳을 바라다본 곳이다.
계약 궤의 최후가 어떠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유배 이후 성전을 재건할 때에 계약 궤를 다시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속죄판을 그 대용으로 이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유배 이후 시대에 가장 거룩한 축일로 자리잡게 되는 속죄일(히브리 말로 ‘욤-키푸르’)에는 속죄판이 전례의 중심을 이룬다(레위 16장).
하느님 현존의 상징
계약 궤는 처음부터 이동 성물(聖物)로 제작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이 이동 중일 때에 계약 궤가 큰 구실을 한다. 이스라엘인들의 이 ‘이동’은 크게 두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이다. 둘째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정치에 이어 종교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안정될 때까지이다. 바로 다윗을 이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하여 계약 궤를 지성소에 모셔놓은 때이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나 모든 면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계약 궤는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시나이 산 계약의 증거인 십계명 판을 보관하는 궤이고, 둘째는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언뜻 이 두 의미가 잘 융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약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둘이 밀접히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계약이다. 야훼님은 시나이 산 계약으로써 당신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면서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계약을 증언하는 십계명 판을 보관하는 계약 궤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계약의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게 된다. 계약 궤와 직접·간접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재앙 또는 죽음을 겪거나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하느님의 이러한 실제적 현존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은 계약 궤를 하느님의 어좌라고(1사무 4,4 참조), 또는 하느님의 “발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역대 28,2; 시편 99,5).
요한 복음서 저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노래한다(요한 1,14). ‘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천막에 살다’를 뜻한다. 저자는 이 낱말로 구약의 “만남의 천막”(성전)과 그 안에 모셔져있던 계약 궤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는 “말씀”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 더 이상 상징적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신다고 밝힌다.
[경향잡지, 2001년 8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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