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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4: 영원한 계약 그리고 이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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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9 조회수4,737 추천수1

[유대인 이야기] (4) 영원한 계약 그리고 이사악


“너와 후손들의 영원한 하느님이 되겠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사악을 양 대신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 사진은 이스라엘 목초지의 양떼들.


-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

 

 

아내 사라의 속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하느님의 딸이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을 믿지 않고 고집 피울 때도 많다.

 

10년 전 일만해도 그렇다. 아내는 하느님께서 아이를 주시겠다는 말을 하셨는데도 믿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 12)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창세 17, 19)

 

물론 나와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말씀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은 아들 이사악을 예고하실 즈음 나와 아내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셨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창세 17, 5) “너의 아내 사라이를 더 이상 사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창세 17, 15)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다. ‘아브라함’에서 ‘아브’는 아빠, 아버지라는 뜻이고 ‘함’은 백성, 민족이라는 뜻이다. 곧 나를 민족들의 아버지, 백성의 아버지로 세우신 것이다. 아내의 새 이름 ‘사라’도 ‘여왕’이라는 뜻이니,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더 나아가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 7) 고 약속하셨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이 있을까. 하느님은 또한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창세 17, 8)고 하셨다. 실제로 하느님은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아비멜렉이 보낸 장수 피콜과의 평화 계약(창세 21, 22-34)을 성사시켜 주시는 등 당신 약속을 하나하나 실현해 보이셨다.

 

이 같은 모든 계약의 증표로 하느님은 ‘할례’(포경절제수술)를 요구하셨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17, 11). 그래서 나는 하느님 말씀대로 할례를 했다.

 

몸종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우리 가족들만의, 독특한 소속감을 드러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할례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이었고, 순명이었다. 언제까지 하느님의 할례 명령이 이어질지 모르지만 당분간 이 할례는 하느님 백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이사악도 태어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도록 했다(창세 21, 4).

 

이사악은 나의 삶의 전부다. 이사악으로 인해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사악이 웃을 때 나도 웃었고, 이사악이 울 때 나도 울었다. 이사악이 태어나기 전, 몸종 하가르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지만, 그들 또한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은 모두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창세 21, 8-21).

 

인간은 여정의 동물, 길 위의 동물(Homo Viator)라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난했던 일생이었다.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이곳까지 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혹독한 기근에 시달려야 했고, 낯선 이방인들과의 수많은 다툼도 거쳐야 했다.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 위에서 시작했고, 또한 그 길 위에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사악은 그런 고난의 여정 끝에 다가온 행복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느님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은 나에게 사형선교나 다름없었다. 나를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그 어떤 형벌도 달게 받을 것이다. 하느님 명령이라면 마른 짚을 등에 지고 불에 뛰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들을 요구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 2)

 

어쩔 수 없다. 하느님은 분명 계획이 있으실 것이다. 아들은 지금 번제물을 태울 장작을 등에 지고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 아들이 묻는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 7)

 

마음이 찢어진다. 하지만 슬픔을 드러낼 순 없다. 아이가 내 뜻을 알고 도망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 8)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었다. 그런 후, 재빨리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렸다. 아들이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럴수록 꽁꽁 묶은 줄은 아들을 더욱 옥죌 뿐이다. 아들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 없다.

 

한쪽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들었다. 그리고 칼을 아들의 목에 가져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다급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 22, 11)

 

[가톨릭신문, 2009년 1월 18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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