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가혹한 운명의 예레미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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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3,275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가혹한 운명의 예레미야
지극히 인간적으로 인내한 사람
구약의 사제들이 잠 짜여진 규정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과 제단에 결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신약의 성전은 성소에서 아주 정확하게 자신의 전례 임무를 완수한 즈가리야 사제로 시작된다. 예수의 한 비유로부터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에 폭행과 약탈을 당한 여행자를 본 사제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말로 냉정하게 그 성격이 묘사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사제는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가버렸다”(루가 10,31). 어쩌면 그 사제는 단 하나의 과제, 즉 성전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만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사제 마을 아나돗 출신인 구약의 사제 예레미야의 생애는 전혀 달랐다. 이전의 대사제 에비아달이 아나돗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예레미야가 숙부 살룸의 밭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그가 사제 에비아달의 후손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는 시골에 거주했으면서도 때때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직분을 수행했다.
그의 소명과 관련 있는 두 가지 환시에서, 예레미야에게는 이러한 말로 예언 사명이 맡겨졌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예레 1,5). 따라서 그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직에 임명되었고, 어른이 되어 정확한 임무를 받았다.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예레 1,18).
이러한 임무를 받은 뒤 성전에 나타난 예레미야는 용기를 내어 사제 계급과 거기에 참석해 있던 백성들을 공격했다. 그는 의식 규정을 알았으나 그것이 겉으로만 준수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기도와 희생에 내적인 태도와 종교 생활이 부합하지 않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는 대문의 계단에 서서 군중에게 비난과 빈정거림이 섞인 채찍을 휘둘렀다.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쫓아와 나의 앞에 서서 살려 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예레 7,9-10). 따라서 설교는 성전의 파괴와 곧 닥칠 유배를 선포함으로써 끝났다.
나아가 근동의 모든 사절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는 상징적인 행위로도 설교했다. 언젠가 그는 옹기장이에게서 작은 오지그릇을 샀고 그것을 머리에 이고 아무 말 없이 예루살렘의 길을 따라 떠났다. 호기심 많은 집단은 그를 지켜보고 따라갔다. 옹기장이 집에 도착한 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며 가름단지를 박살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 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예레 19,11). 또 언젠가 그는 쇠멍에를 메고 떠돌게 되었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이 모든 민족에게 쇠멍에를 메워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리라”(예레 28,14).
이러한 독특한 행동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의 생애 전체도 계속적인 참회의 설교였다. 하느님은 그에게 분명히 독신으로 지내고 가정을 이루어 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가정은 흩어지고 모두가 포로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예레 16.l-4).
하느님은 또한 그에게 당신의 백성에 대한 자비가 끝났음을 일러주려고 상복을 입거나 초상집에 가는 것을 금하셨다(예레 16.5-7). 또한 축제가 벌어지는 잔칫집에 참석하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나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목소리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예레 16.8-9).
예레미야의 이러한 설교는 백성에게, 그리고 그보다는 그들의 우두머리들에게 더 잘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언자를 감금하고, 형벌을 주고, 속박하고, 굶어 죽게 하려고 물이 없는 우물에 던졌다. 그는 이렇게 자기 생애 동안 그의 백성에게 닥칠 재난을 최초로 견디어 냈다. 이것 역시 그의 예언적 사명의 일부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이렇듯 긴밀히 연결된, 고통으로 가득 찬 이러한 생애는 예레미야서에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일부는 그의 스승의 고통을 예리하게 조사하고 그에 대해서 삼인칭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예레미야의 제자 바룩에 의해 쓰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다른 부분들은 일인칭으로 쓰여졌고 예레미야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죽을 때까지 박해받은 한 인간에 대한 표현이요, 하느님을 향한 토로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자신의 소명 안에서 몹시 괴로움을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에 대하여 완화해 줄 것을 호소하는 기도이다. “이 괴로움은 왜 끝이 없습니까? 마음의 상처는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예레 15,18).
그러나 더욱 깊은 상처, 예언자의 마음을 다른 무엇보다도 쓰라리게 한 것은 비극적으로 수많은 역경에 부닥친 백성들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고통은 하느님의 무서운 금지령에서 더욱 분명하게 감지된다. “너는 이런 백성을 너그럽게 보아 달라고 빌지 말라. 용서해 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하지도 말고, 떼를 쓰지도 말라. 나는 너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으리라”(예레 7,16). 예레미야의 고뇌는 무익했다. 왜냐하면 백성들 스스로가 이 고통받는 사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선포된 역경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환의 예언자
예레미야서에 의해 다른 어떤 예언서보다도 더 분명하게 예언자의 성격을 알게 된다. 단편적인 묘사를 통해서이긴 해도 예레미야의 내적인 성향, 마음 자체를 깊이 있게 꿰뚫어 볼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책은 자서전도 아니고 예언자의 개인적인 작품도 아니며 그의 제자 바룩의 작품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왔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그 두루마리에 모두 기록하였다”(예레 36,4). 우리는 마음속으로 스승의 발치에 앉아서 스승이 불러 주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듣고 기록하는 제자를 그려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룩의 작품은 피상적으로 고려해 볼 때 예측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그 내용과 같은 많은 말을 더 불러 주어 함께 적도록 하였다.”(예레 36,32)는 것을 우리는 읽는다. 여기서 바룩이 예레미야서의 구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뚜렷해지고, 나아가 전작품을 모은 것이 바로 그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언자로부터 들은 상세한 내용에다 그는 일인칭으로 양식화된 형태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다른 가지들, 그리고 예언자의 생애의 중요한 사실들을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아마도 예레미야가 죽은 뒤, 책을 펴낸 것은 바룩이었다. 따라서 그 책은 대부분이 예레미야의 작품이고 일부는 바룩의 작품이다.
예레미야의 삶과 작품에서 확인되는 것이 어쩌면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에도 대체로 입증되는 것일까? 사실 다른 예언자들도 그 주위에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고 따라서 다른 예언서들도 그 제자들에 의해 집필되고 출간되었다고 믿는다. 실로 예언서의 대부분은 응집력이 결여되어 있고, 많은 경우 말하는 이는 예언자 자신이 아니고 예언자를 삼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도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고, 언젠가 그들 가운데 하나에게 봉인된 예언 메시지를 보관하고 그 동료 제자들 사이에서 참된 규범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이사 8,16). 게다가 이사야서를 읽어 보면 작품 전체가 몹시 이질적이고 독단적인 하나의 모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면, 흔히 그런 식으로 하나의 예언서가 시작되는 그의 소명에 대한 환시는 원래 따로 떨어 진 소책자였을 임마누엘에 관한 일련의 예언(이사7,12)이 개시되는 제6장에서 발견된다. 이 시리즈 앞엔 이른바 “시온의 노래”라는 예루살렘에 대한 짧은 예언 모임이 있다(이사 2-5장). 더욱이 제1장 서두에 하나의 제목이 있고(1,1) 제2장 서두에 또 다른 제목이 있다(2,1). 이는, 대부분의 사건에 있어서 이샤야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형태의 책이 그의 제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어느 시대에나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이사 40-66장)이 앞의 장들(이사 1-39장)과는 전혀 다른 어조와 분위기를 띠고 있디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 두 번째 부분은 유다와의 전쟁과 예루살렘 포위 공격 - 첫 번째 부분이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기원전 735~700년의 상황 -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거기서 예루살렘은 멸망된 것으로 나타나고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 상복을 입고 있다.
구약 성서의 예언서들 가운데서 이 두 번째 부분은 모든 장에서 말하고 있는 계속적인 위안으로도 구별된다. 통상적으로 예언서는 재난과 위협을 선포하는 반면 이 두 번째 부분에서는 벌을 기워 갚았고 몹시 갈망하던 구원이 가깝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풍부한 상징으로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된다. 즉 외국에서의 병역이 끝난다(이사 40,2), 죄인들의 사슬이 풀리고(이사 52.2), 버림받은 신부가 그의 신랑에게 돌아올 것이다(54,1-5). 두 번째 출애굽이 가깝고, 바다와 강이 마를 것이며(50,2), 바위가 깨뜨려지고 사막에 물이 넘쳐흐를 것이다(48,21). 큰길이 닦이게 될 것이며(40,3-4), 하느님 친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52,7-12).
따라서 이 두 번째 부분은 참 이사야 이후 1세기 반이 지난 550년경에 쓰여졌다는 인상을 준다. 이사야 자신이 미래에 관한 환시를 통하여 이러한 일들을 기록했고 선포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으나 오늘날은 적어도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이 대예언자보다 오래 살아 남은 제자단의 작품이라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다. 귀환의 예언자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예언들을 선포한 반면에 다른 동료 제자들은 그것을 스승의 작품, 즉 그들의 환경에서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 옛 이사야서에 덧붙임으로써 기록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완결된 작품을 보면, 40~66장의 예언 전부가 이의 없이 저 “귀환의 예언자”(제2 이사야)의 작품은 아니고 40~55장만이 그의 작품인 반면에 나머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아마도 팔레스티나에서 살았을 세 번째 예언자(Trito-Isaia)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이 옳다. 언어, 필체, 교리의 차이는 그러한 저자의 구분에 주요한 논거가 되며, 55~66장의 경우 (1) 신적 초월에 대한 교리와 (2) 율법, 안식일, 예배 규정의 실천, 특히 우상 숭배로부터의 탈피와 함께 인간적인 참여 그리고 (3)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의 실천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은 그 책의 영감(靈感)과 예언적 특성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요나의 사명
나자렛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가나에 이르는 길의 오른쪽에 작은 아랍 마을 메셰드(Mesjed)가 있다. 바로 열왕기 하권 14장 25절에서 예언자 요나의 출신지로 언급되는 예전의 갓헤벨(Cat-Chevel)이다. 있을 수 있는 이러한 일치 때문에 메셰드의 주민들은 작고 초라한 회교 사원에 있는 요나의 무덤을 지적하는 데 익숙해 있다.
이 유적 앞에서 옛 순례자는 두 번 무덤에 묻힌 - 처음에는 바다 괴물의 뱃속에 묻히고, 마침내 갈릴래아의 산에서 발굴된 작은 무덤에 묻힌 - 예언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이 무덤 곁에서 다르싯으로 가는 배에서 도망친 요나를 상상으로 다시 보았다. 순례자는 폭풍, 죄인의 신원, 그리고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의 그의 포기를 생생하게 상상하였다. 조난자가 바다 괴물에게 빨려 들어갔다는 사실은 상상하는 데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나 그것이 성서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예언자의 생애는 니느웨의 회개에서 그 에필로그를 찾았다. 오직 어떻게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 후에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갔는지 설명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도, 성서의 독자도 깊은 존경심을 갖고 하느님의 위대한 기적에 대해 생각했다.
반면에 오늘날의 순례자는 아주 다른 눈으로 메셰드의 회교 사원을 주시한다. 그에게도 마을이 열왕기에서 민족주의적인 편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하느님의 사절인 아미때의 아들 예언자 요나의 출신지를 나타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대의 방문객조차 요나서에 대해 줄곧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의 주인공이 같은 이름을 갖고 있고 아미때의 아들과 같은 모양으로 그 역시 엄밀히 민족주의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방문객의 상상도 통상적으로 아주 다양하다.
사실, 현대인은 한편으로 열왕기에서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를 알아 보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 요나서의 저자에게서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자료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가 다른 목표를 의도했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 책은 성인전 작가가 모든 독자에게 느끼게 하려고 하고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한 이스라엘에게로 돌려진 하느님의 선포에 담겨 있는 문제를 두드러지게 설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선포는 그러한 모양으로 예언적 메시지들 사이에서 열거된다. 그러므로 요나서가 열왕기의 문학 유형과 다른 문학 유형이란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장에서 극히 명료하게 구분되는 성서적인 설교의 텍스트를 제공한다.
비교적 작은 이 책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적과 마주치게 된다. 갑자기 몰아치다가 같은 속도로 가라앉는 바다 위의 폭풍, 요나에게 떨어지는 운명, 조난자를 꿀꺽 삼킨 후 땅에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뱉어 놓는 불가사의한 괴물, 니느웨의 회개와 관련된 위대한 기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날 커졌다가 말라 버리는 아주까리의 기적……. 덧붙여, 많은 기적들은 불균형을 이룰 정도로 크고, 지나치게 크며, 실제로 일어나기에는 알맞지 않다. 사실, 니느웨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요나에게 확신을 줄 목적으로 불가사의한 나무를 크게 하셨다가 사라지게 하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일련의 기적들은, 만일 그 모두가 - 성인전 작가에 의하면 - 기적적인 일들이 시나리오에 의해 필요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색채를 부여하려는 이야기로 간주된다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바로 예수께서 탕자의 이야기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사랑이시다.”라는 메시지에 색채와 깊이를 주시듯이, 요나서의 저자는 그의 기적적인 이야기로 “하느님은 이방인들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마지막 장의 불가사의 한 나무는 요나에게 운명 지워지지 않고, 그 묘사로 독자를 마지막 질문, 즉 “내가 어찌 이 큰 도시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에 대비시킨다.
따라서 요나서는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정신을 바꾸어 놓고자 하시는 데 이용하시는 일련의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라, 저자가 모든 독자에게 그분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선의도 배척도 없는 하느님의 보편적 선을 묘사함으로써 확신을 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진실일까 하는 질문에 우리는 그것이 성인전 작가에 의해서 의도되었다는 의미에서 진실이라고, 하느님의 선에 대한 메시지로서 진실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9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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