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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하느님의 아들,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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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3,111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하느님의 아들, 예수

 

 

악마들의 승리자 예수

 

되풀이 말하지만, 우리는 마태오의 체계적인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특별한 묘사를 어려움 없이 본다. 분명하게 강조되는 다섯 개의 즉 담화는 예수를 스승으로 소개한다. 반면에 마르코의 복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고유한 계획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의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욱 수집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 예수의 생애의 단순하고 생생한 순간들이 정해진 순서 없이 서로서로 따라 나온다. 거기에서는 하나의 고정된 노선을 발견하기 어렵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도 단편적인 기록들 사이에서 마르코 복음에서 지배적인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결정적인 관심사를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발견된다. 동시에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자신의 묘사에서 동일한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우두머리로서 교회 안에 초기 이방인들을 모았다. 그는 이것을 가이사리아에서, 로마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납득하였다. 고르넬리오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베드로는 예수의 삶에 대해 짤막한 평을 해야 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사도 10,37-38). 예수의 공생활은 몇 마디로 말해서 악마에 대한 계속되는 승리로 특징지어진다.

 

베드로의 제자는 예수의 공생활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할 때 악마의 힘을 상대로 한 예수의 투쟁에 대해 분명히 상당한 관심을 드러낸다. 비슷한 사건들에 대한 묘사를 마르코가 선호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실상 마르코 복음의 첫번째 극적인 기적은 악마 추방(구마)이다.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1,23-27).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게서도 악마들을 쫓아내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이나, 마르코는 그것을 기록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드러낸다. 악마 추방은 마르코의 복음에서는 첫번째 기적이면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기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묘사가 생생하여 언제나 놀랍다. 예를 틀면, 게라사 지방에서의 악마 추방은 웅장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마귀 들린 사람들 앞에서 무력하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마르 5,4). 예수의 권능은 그에게 이례적으로 당당한 권능으로 드러났다.

 

예수의 권한은 마귀 들린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본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위대하게 나타난다. 첫번째 기적에서 해로운 악령은 득의 양양해서 외친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선 거룩한 분이십니다”(마르 1,24). 또한 다른 데서도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안다고 자랑한다(마르 1,34; 3,11; 5,7). 근동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을 뜻하므로, 악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예수를 자기 권한 안에 두기라도 한 듯 득의 양양하게 자랑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두려운 폭군보다 더 큰 권능을 지니셨다.

 

예수의 승리는 새로운 나라를 위해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사탄의 유혹들이 영구히 패배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마르코는 예수께서 점차로 그분의 권한을 사도들에게 넘기신다는 것을 두 번이나 말씀하시도록 하고 있다. 그분은 그들을 뽑으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마르 3,15; 6,3) 주시어 파견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악마에 대한 영원한 승리다.

 

이미 말했듯이, 전승은 마르코가 베드로의 제자였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마르코의 비전이 이를 입증한다. 같은 전승은 또한 마르코가 그의 복음을 로마에서, 다시 말해 이방인들을 위해 썼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이 역시 예수에 대한 마르코의 비전으로 입증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이방인들에게 확신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마태오가 했듯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게 호소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구약 성서를 알지 못했던 반면에 단지 자기들이 두려움과 공포 속에 섬기는 우상들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코에게는 이방인의 우상들이 악마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시편 96,5), 그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에게 합당한 신적 권한을 소유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양한 부분들과 악마의 추방 기사들이 집중되는 두번째 복음서의 정점은 십자가 아래서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한 고백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하느님의 힘 아래

 

복음서들의 주인공이 -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모든 권능 위에 들어 올려진 - 자기 자신을 한충 더 높은 권능에 종속시킨다는 사실은 어쩐지 놀라운 일이다. 사실 많은 순간에 예수께서는 전능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생명이 그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은 죽음의 침상에서 혹은 적어도 무덤에서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신다. 반면에 자신의 죽음과 관련될 때, 그분은 자기 생애의 길이 다른 분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에게 달려 있다고 느낀다.

 

자신의 공적인 활동이 성공을 이루는 동안에 그분은 자기 생애의 종말에 대해 침묵하신다. 세상을 영구적인 승리로 정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들의 반대 이후에 그리고 군중으로부터 물러나 계신 뒤에 그분은 그분에게 충실한 집단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신다.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오로지 그들에게만 나라의 신비에 귀기울이는 것이 허용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에 대해 아버지께서 지니신 계획을 밝히실 때 유일하게 참석한 것도 그들이다. “그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선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마르 8,31-32).

 

이러한 신비는 사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그 내용은 지지할 수 없었으나 예수께서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의무”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분이 그러한 사명을 밝히신 말씀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예고되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다니엘의 예언(다니 2,28-29)을 생각나게 하였다. 예수의 경우에도 하느님의 요청, 아들이 마땅히 종속되어야 하는 아버지께 대한 임무가 있었으니까.

 

오늘날의 독자가 여기나 혹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의 입에서 나온 하느님의 뜻을 그렇게 풀리는 것으로 이해할 때, 예수 자신은 이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때때로 그분이 당신의 과제를 구약성서의 예언들로부터, 특히 이사야서나 수난과 관련 있는 시편들로부터 이해하셨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시대에 유다 공동체는 수난의 예언들을 메시아에게 적용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생애에서 메시아적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도록 배려하는 마태오조차도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 안에 예언의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다. 루가에게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할지라도 뚜렷한 어떤 예언도 인증하지 않는다(루가 24,26.4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장래의 수난을 다른 방식으로 아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세속적인 설명을 따라가고 예수의 인간적 인식이 어쨌든 그분의 신적 인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그런 식으로 자기 생애의 책무를 아셨으므로 사도들에게 그것을 전하셨다.

 

이들이 스승의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에 관한 예언의 삼중 반복으로부터, 마태오나 마르코 그리고 루가에서 모두 발견되는 - 두번째 복음서 저자에게서는 특별히 더 눈에 띄는 - 하나의 반복으로부터 드러난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 우리는 이를 이미 말했지만 - 예수의 말씀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고, 세 번이나 반복되는 하나의 일은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 세 개의 예언이 밀도 높은 리듬으로 이어지는(마르 8,31-35; 9,30-32; 10,32-34) 그만큼 더 독특하고 긴박한 연결이라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언은 마르코 복음에서 더욱 작은 특성에 이르기까지 공들여 작성되어 있다. 실상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발걸음을 옮기는 중 예수께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싸여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앞에 서신다. 그리고는 열두 제자를 향해 얼마나한 일이 당신에게 닥쳐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10,32-34).

 

분명한 제시에도 사도들은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다(마르 9,32). 그리고 예수께서 그것을 선포하셨을 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도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예수의 수난이 시작될 때 그들은 도망칠 것이다.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도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마르 16,11-14). 오로지 성령의 은혜로 그들은 믿음과 사실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받았을 뿐이며, 그리고는 수난에 대한 예언을 여러 차례 정확하게 반복했을 뿐이다. 예보와 성취는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를 믿기 위한 논거가 될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복종은 악마들의 세력에 대한 그분의 지배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의 지배는 그분의 메시아적 품위에 대한 유력한 입증이다. 동시에 성부께 대한 그분의 복종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명이 지닌 메시아적 특성에 대한 표명이 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6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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