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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사가 루카가 전하는 기쁨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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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983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복음사가 루가가 전하는 기쁨의 메시지

 

 

천사와의 대화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의 메시지는 주로 꿈속에서 천사로부터 전달된다. 은총을 입은 사람은 깨어난 뒤 꿈속에서 그에게 제시된 것을 실행한다(마태 1,20-24; 2, 13-14. 19-21). 그것은 구약과 고대 근동에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개념과 결부된다.

 

루가 복음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된다. 그 역시 하느님의 계시가 꿈꾸는 동안에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사도 16,9; l8,19). 그러나 천사의 발현에 대해 말할 때 사자(使者)는 독특하게 생생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그는 분향 제단의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다(루가 1,11). 천사는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고(루가 1,28), 밤새 깨어 지키는 목자들 가까이 있고(루가 2,9), 목자들이 있는 들판 위에서 하늘의 군대와 함께 션회한다(루가 2,13). 다시 한번 더 이 천사 발현에 대한 표현은 ‘화가’ 루가의 예술적인 재능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억되어야 마땅한 복음서 저자의 문학적 능력이다.

 

사실적인 묘사를 담은 정교한 작품에는 천사와 통지를 받은 사람 사이의 생생한 접촉이 있다. 메시지를 받는 순간에 잠들어 있는 인간은 수동적이다. 깨어난 뒤라야만 행동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깨어 있는 인간은 천사의 방문을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그는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사자가 설명하거나 확실해지는 망설임을 나타낼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루가 복음에서 즈가리야가 설명을 청하고 뒤에 천사로부터 해설을 듣는 것을 읽게 된다. 마리아 역시 질문을 던지고 천사로부터 응답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루가는 우리에게 하늘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동안 있었던 두 가지 대화를 전한다(루가 1,11-20. 28-38). 그것은 특별한 주의를 끌 만하다.

 

한층 가까이서 관찰해 보면, 두 대화가 구성에 관한 한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즈가리야든 마리아든 천사의 발현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나, 둘 다 모두 천사로부터 평온을 되찾게 된다. 메시지가 전달된 뒤 즈가리야나 마리아는 어려움을 제시한다. 둘 다 천사가 불가능한 일을 예고했다고 생각한다. 두 경우 다, 천사는 응답을 하고 명백하게 불가능한 일에 대한 확인으로서 한 가지 표정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증이 있은 뒤 즈가리야는 깜짝 놀라 말없이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된다. 마리아는 지극히 겸손되이 말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대화의 정교한 작성에서 어떤 표현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고정되어 있다. 즈가리야와 마리아의 물음 서두는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루가 l,19.35)는 응답의 서두에서처럼 같은 방식으로 울려 나온다. 표징 역시 두 경우 다 “자, 보아라.”(루가 1,20.36)로 예고된다. 대화 자체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루가 l,13.30)는 천사의 말만이 문자로 두 번 되풀이된다. 천사와 즈가리야와 마리아의 다른 말들은 본래의 대화를 가리킨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그처럼 다르다.

 

그러나 대화의 한 부분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해야만 한다. 두 가지 대화에서, 특히 즈가리야와 나눈 첫 번째 대화에서는 구약에서 나온 몇 가지 인용문들이 되풀이된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라는 즈가리야의 물음은,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질문처럼 창세기 15장 8절에서 문자 그대로 발견된다. 다른 표현들도 구약에서 발견된다. 두 가지 예고가 바로 옛 성서의 표현 수법을 보여 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한 ‘발견’ 뒤에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묻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구약 성서의 인용문들이 대화 속에 보고 되느냐와 두 대화의 구조 속에 있는 수많은 유사점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용문들을 고려해 보더라도 천사나 즈가리야가 이미 구약 성서에서 반복되는 말들을 사용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 경우에 루가의 보고는 엄밀하게 문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거기에 자기 자신의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즉 그는 구약과 신약의 연결선을 만들기 위하여 대화에 의도적으로 성서적인 색채를 입혔다.

 

대화의 굴절들은 특히 이해가 잘 안되고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할 경우에 자연적인 부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자가 독자의 마음에 메시지를 더욱 깊이 심어 주기 위하여 그리고 두 탄생의 기적적인 성격을 더욱 눈에 띄게 하기 위하여 첨가했다는 것을 배제하지 못한다.

 

결론으로 우리는 옛 해석들이 대화를 문자 그대로 보고한 것으로 보는 반면에, 현대의 해석들은 두 대화를 저자의 창작물로 제시한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진실은 한가운데 있다. 즉 본질적으로 하나의 메시지가 있었고, 망설임이 있었다. 복음서 저자는 이 구체적인 대화의 물음과 응답에 성서적인 형태를 제공한 것이다.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복음’이라는 말은 기쁨의 메시지를 뜻한다. 구약 성서는 이미 수세기에 걸친 하느님의 메시지였고, 신약 성서는 그것의 계속이다. 그러나 구약 성서와 비교하여 신약 성서는 명백하고 타당하게 ‘기쁜 소식’ 혹은 ‘기쁨의 예고(통보)’ 또는 복음이라고 불린다. 신약 성서 모두가 기쁜 소식을 담고 있는데도 구어법(口語法)은 처음의 네 권에만 ‘복음’이라는 말을 썼다. 그것으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하는 기록에서 기쁨을 기대하고 발견한다는 의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기쁜 소식에 대한 네 가지 보고 가운데 루가 복음은, 특히 ‘기쁨’이라는 독특한 묘사 때문에 깊은 인상을 준다. 루가의 작품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기쁨의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은 하늘의 메시지 혹은 하느님과 마주쳤을 때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 구약에서 하느님을 뵙는 것은 죽는 것과 같았다. 삼손의 부모들은 하느님의 발현을 접했을 때 그들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룩한 분을 뵙게 되었으니 우리는 영락없이 죽게 되었어.’ 하고 마노아가 아내에게 걱정스러운 소리를 했다.”(판관 13,22).

 

루가의 복음은 레위 사제 즈가리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즈가리야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다. ‘성소’에서 즈가리야는 하늘로부터 방문을 받았다. 그것은 신약 세계에서 하느님과 처음 접촉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구약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즈가리야는 몹시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루가 1,12). 그러자 새로운 계약의 계시가 시작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즈가리야’(루가 l,13) 구약의 공포는 기쁜 소식의 분위기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하느님과 마리아의 접촉에서 우리는 같은 반응을 발견한다.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이 혼란스럽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울려 퍼친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루가 1,30)

 

이러한 준비가 있은 뒤, 구세주의 탄생이 성탄 밤에 실현될 때, 구약의 분위기는 완전히 분쇄되고 베들레헴의 들판 위에 첫 번째로 기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이러한 기쁨을 언급하는 것은 복음서 저자 루가뿐이다.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하고 말하였다”(루가 2,10-11)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은 큰 기쁨으로 규정된다. 그분의 생애, 그분의 출현, 그분의 수난은 오로지 큰 기쁨을 뜻한다.

 

루가는 예수의 감추어진 생애에 대해 얼마 안되는 작은 일화들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기쁨의 요소는 주로 그분의 공생활 중에 발견된다. 이 기쁨에 참여하는 첫 번째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제자들이다. 둘씩 둘씩 성지 끝에서 끝까지 파견된 그들은 하늘 나라를 설교하고 악마의 세력을 내쫓는다. “일흔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루가 10,17).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기쁨을 정화시키고자 하신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하여라”(루가 10,20)

 

또한 백성도 예수의 출현에 기뻐한다. 루가는 그것을 두 번 총체적으로 요약한다. 첫 번째는 다른 것이 아니라 루가 자신이 반영시킨 것이다. 모든 백성은 그분이 행하신 기적적인 일들을 기뻐하였다(루가 13,17). 다른 것은 파스카를 맞아 예루살렘에 온 유다 순례자들의 자발적인 열광에서 드러난다. 성지주일에, 기쁜 행렬 가운데 예수의 출현이 그들의 마음에 미친 인상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모두가 알게 해주었다. “예수께서 앞으로 나아가시자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았다. 예수께서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19,36-37). 이제 예수의 공생활이 불러일으킨 인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쁨으로 나타내는 것은 루가만이 아니라 충실한 군중 전부다.

 

루가는 예수의 공생활의 시작을 기쁨의 메시지로 예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던 날 그분의 권능을 기쁨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가 24,51-52). 기쁨은 예수의 전생애의 틀이다.

 

올리브산으로부터 기쁨은 성전의 첨탑과 도시로 내려왔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퍼졌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시작된 같은 기쁨의 주제를 루가는 그의 작품의 둘째 부분에서 지속시킬 것이다. 사도 행전은 바로 기쁨의 보급에 대한 첫 번째 역사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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