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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가난한 이를 위한 하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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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3,515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신약] 가난한 이를 위한 하늘 나라

 

 

“나자렛으로 가셨다”

 

성서를 펼쳐 보면 나자렛이라는 이름이 드물게 나오는 데 놀란다. 구약 성서에서 그 마을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마을은 기원전 700년이나 600년에 처음으로 식민 거주지였고, 유배 이후에야 작은 도시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신약 성서에서 그 이름은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몇 차례 발견된다. 그것도 마태오 복음에서 두 번, 마르코 복음에서 한 번 그리고 루가 복음에서 한 번 발견된다. 그러나 루가가 예수의 공생활에 대한 자신의 보고에서 그 도시를 언급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유일한 경우다.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예수의 공생활을 요르단 강의 세례로 시작한다. 모두가 그 강에서 예수께 발현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례 장소를 묘사하는 데는 모두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세례와 광야에서 받은 유혹 이후에 - 광야에 대한 언급은 예리고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 모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북쪽, 즉 그분의 젊은 시절의 마을로 향하시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환에 대한 보고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갈라진다. 마르코 복음은, 관습대로, 극히 짧고,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마르 1,14). 마태오 복음은 훨씬 더 정확하다. “예수께서는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마태 4,13). 이것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다. 즉 예수께서는 ‘왼편의’ 나자렛을 떠나시어 해안가에 정착하셨다. 사실 마태오는 나자렛으로 귀환한 것이나 예수께서 쫓겨 나시는 것에 대해서는 훨씬 적게 이야기한다. 다만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머물기를 확실히 좋아하셨고, 이 도시를 예수의 도시라고 부른다고 이야기할 뿐이다(마태 9,1). 마태오에 따르면(13,54), 예수께서는 오래 체류하신 뒤에야 나자렛으로 돌아가셨다. 그 뒤 예수께서 탄생하신 마을의 회당에 나타나셨을 때 주민들은 비방을 늘어놓았다. 마태오에 따르면 이러한 사건은 예수의 공생활 중 아주 늦은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입증된다. 올바른 판단이다.

 

그러면 루가는 어떠한가? 그도 역시 예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갈릴래아로 돌아오신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출현을 포괄적이고, 마르코가 그런 것처럼 대략적으로 묘사한다(루가 4,15). 그러나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내려오시기 전에(루가 4,31) 나자렛에 가신 것에 대해 폭 넓게 보고한다. 따라서 루가는 예수께서는 나자렛을 ‘왼편에’ 두고 떠나시지 않고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셨다”(루가 4,16)고 보고한다. 모든 것이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된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께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였다”(루가 4,17-22). 이러한 보고는 경탄만이 아니라 동의를 불러일으킨다.

 

루가의 보고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간결한 대화와 강한 반박 혹은 적어도 격리가 설명될 수 있는 비난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루가 4,23). 이렇게 그분의 입장에서 응답하신 데에는 비난이 섞여 있다. 엘리야는 고향 밖의 이방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사는 시리아 사람인 나병 환자 나아만만을 고쳐 주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비난의 원인이었던 동기는 루가 복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과만이 발견될 뿐이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28-30). 루가한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결론이, 즉 예수께 강요된 격리가 중요하다.

 

그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훨씬 뒤에, 가파르나움에서 예수의 불가사의한 현현(顯現) 후에 발생했다. 그것은 유열한 비난으로 입증된다.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루가는 고의로 예수의 추방을 예상한다. 그분을 처음부터 순례자로 또는 고향이 없는 망명자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서 루가에게 예수의 공생활은 은혜를 베풀며 순례하는 것이다. 나자렛은 그분이 순례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양성된’ 장소이다.

 

루가의 시각에서,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은혜를 베풀며 다니시는 분으로 남는다. 처음에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함께, 나중에는 모든 제자들과 함께.

 

 

라자로를 위한 하늘 나라

 

루가는 통상적으로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 화가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그는 자기의 기록 안에 우리한테는 특별히 귀중한, 훌륭한 인물화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복음서 앞의 두 장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자애가 넘친 행복이 묘사되어 있고, 뒤 이은 장에는 유능한 예술가가 공들여 작성한 예수의 이미지가 들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는 하느님의 관대한 사랑, 성부의 자비로운 선의 표현임을 드러낸다. 예수의 거의 모든 행동과 모든 말씀으로 그것은 얼마나 찬연히 빛나는가! 그러나 그것은 루가한테서 예외적으로 발견되는 비유에서 아주 특별하게 증명된다. 방탕한 아들, 착한 사마리아인, 라자로와 부유한 연회자의 비유가 그렇다. 그러한 표현 때문에 루가는 예수의 온유함을 그린 화가라고 불렸다.

 

들어주시는 온유함은 여러 차례 우리를 감탄하게 한다. 그러다가 이것은 우리를 난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라자로와 부유한 연회자의 비유를 읽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잘 입증되는가(루가 16,19-31).

 

부자와 가난한 이의 대비 - 근동에서는 빈번한 대비다. - 는 한 귀족의 집 문간에서 묘사된다. 개들은 가난한 사람의 냄새를 맡아 보고 그를 핥는다. 반대로 부자는 자줏빛 도포와 훌륭한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으며, 매일같이 풍성한 식탁을 차리고, 매일같이 크나큰 기쁨 속에서 잔치를 연다.

 

죽음 뒤에도 대비는 계속되지만, 역할은 뒤집어진다. 라자로는 풍성한 식탁에 있고 아브라함은 그 초대자다. 가난한 손님은 영예로운 자리에,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 부자는 성대한 장례식 뒤 고통, 벌 그리고 불 고문에 맡겨진다. 아브라함의 말은 역할아 바뀐 것을 정당한 일로 제시한다.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자연히 누구나 죽음이 곧바로 그러한 전도를 가져오는지 묻는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적어도 어떤 도덕적인 조건들은, 죽은 사람의 신앙에 따라 - 복음서 자체의 교리에 따르면 - 착한 업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에 따라 고려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고 관련된 이들의 도덕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가난한 이와 부자 사이의 관계를 세우려는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우기를 갈망하고, 부자는 벌받는 중에 라자로의 손가락에 찍힌 물 한 방울을 청한다. 죽은 뒤에는 고통받는 이를 위안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나큰 의무다. 따라서 부자에게는, 대중적인 언어가 ‘라자로와 부유한 연회자’를 비유의 판에 박힌 제목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태만을비난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의 단죄 이유를 밝히고 나면 가난한 사람의 삶에서 도덕적인 선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는 지상에서 가난했다는 제목만으로 하늘에 들어 올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한가?

 

루가 복음에서는 효과적인 가난을 권장하는 다른 말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루가의 진복(眞福)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진복과 다르게 들린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6) 대신에 루가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루가 6,20-21)고 말한다.

 

바오로의 추종자로서, 고대 세계의 선교사로서, 루가는 자주 지속된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빈번한 단식과 추위와 헐벗음 속에서 피로와 고통과 함께 궁핍을 몸으로 산 것으로 보인다(2고린 11,27). 그는 그렇게 그 가치를 입증했고, 가난의 주제로서 예수의 말씀들은 그에게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 말씀들을 묵상했고 행동에 옮겼으며, 독자들의 반성을 위해 그것들을 제시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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