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베드로: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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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7 | 조회수3,981 | 추천수0 | |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
베드로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불리게 된 이야기(공관복음)는 지난번에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그가 사목직에 불리게 되는 이야기(요한 복음)를 살펴본다. 두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은 다같이 갈릴래아 또는 겐네사렛 호수이지만, 시간적 배경은 다르다.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아직 공생활에 몸담고 계실 때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반면, 요한 복음의 이야기는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부활하신 뒤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요한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세 가지로 전한다. 그 가운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발현하신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따뜻한 애정이 가득히 드러난다. 본디 이 이야기가 실린 본문 21장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실이 본문의 정통성이나 그 내용의 중요성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어느 날 티베리아 호숫가에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일곱이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던 스승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생업에 종사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시몬을 따라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섰으나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은 다음날 먼동이 틀 무렵 호숫가에 나그네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아무도 그분이 자기네 스승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여보시오들, 고기 좀 잡았소?” 그분이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시오.” 그분의 말씀대로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더니 백쉰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그물에 잔뜩 잡혔다. 153은 상징적인 숫자로 당시 알려진 이 세상 물고기의 가짓수를 가리키기도 하고, 1에서 17까지 더한 숫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17은 완전한 숫자 10과 7일을 더한 숫자이니 매우 많다는 뜻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요한이 먼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알려준다. 거의 벗은 채로 고기잡이에 몰두하던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에 뛰어들었다. 스승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배가 뭍에 가까이 가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뭍으로 올라와 보니 숯불이 지펴있었고 생선과 빵도 있었다. 숯불 둘레에 옹기종기 모여 밤새 호수의 찬 물에 젖은 몸을 말리면서 스승이 손수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하던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해 하였을까! 그분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갈릴래아의 천한 어부들을 이처럼 따뜻하게 맞이하는 이가 그분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21. 15(“공동번역”)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떼를 맡기시기 전에 먼저 세 번에 걸친 질문으로 당신께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하신다. 사몬 베드로에게 하신 첫 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요한(‘요나’의 변형일 수 있음)의 아들 시몬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에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3), 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한 13,37) 하고 장담한 적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그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태 26,34; 요한 13,38). 과연 시몬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에게서 다른 제자들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니, 어찌 베드로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라는 말마디를 붙여 간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두 가지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예수님의 질문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말 원전에 따라 예수님의 질문을 직역하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또는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이 질문을 세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겠다. 1) 여기 있는 네 동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2) 네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 사용하는 이런 배나 그물 같은 장비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3) 네 동료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는 예수님 스스로 당신 자신과 제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베드로에게 어느 쪽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실 리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이다. 두 번째는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온 제자들에게는 맞지 않는 해석이다. 나머지 세 번째 해석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베드로와 관련된 복음서 전승의 문맥과 가장 부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공동번역도 세 번째 의미로 이해하여 의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을 문맥에서 분리시켜 요한 공동체나 더 나아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적용할 때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석도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다. 곧 사목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부모 형제 친구 등 자신에게 가까운 어떤 사람들 또는 자신의 어떤 소유물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응답에 나오는 ‘사랑하다’는 동사가 달리 쓰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저자가 단순한 문제에 변화를 주려고 두 개의 동사를 동의어로 바꿔 쓴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두 동사의 사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뒤의 경우를 받아들여 살펴보자. 예수님의 질문에 나오는 ‘사랑하다’는 동사 ‘아가파오’는 보통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순수한 사랑,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사랑을 뜻하는 반면, 베드로의 응답에 나오는 동사 ‘필레오’는 친구의 상호 우정처럼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필레오’를 ‘좋아하다’로 옮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가 과연 다른 제자들에 앞서서 당신을 순수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좋아하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스스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품격을 낮추었다고나 할까?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단순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이 부사는 원전에는 없음) 사랑하느냐?”였다.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라는 비교급이 빠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정도도 그만큼 낮아진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째 대답도 첫 번째와 같았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서는 비교급이 빠진 것은 물론, 동사까지도 ‘사랑하다’(아가파오)에서 ‘좋아하다’(필레오)로 바뀐다. 이 질문을 받고서 베드로는 마음이 슬퍼졌다.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나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은 내가 세 번 배반한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를 되갚으려 하시는 것인가? 더구나 동사까지도 바꾸시면서 낮은 단계의 사랑만을 확인하시다니! 이제 그분은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않으시는가 보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처음 두 질문에서보다 더 간절하게 과거 자신이 주님께 보여준 충성스러운 행동들에 대한 그분의 기억에 호소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생각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베드로의 응답에 다같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만 하시면서 사목직을 맡기신다.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은 그분께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둔다. 이 세상 누구보다 어떤 가치보다 더 그분을 사랑해야 하며, 누구보다 앞서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순수하고 사심없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분의 목자들도 베드로처럼 연약한 인간인지라 자신들의 말이나 열정과 달리 쉽게 죄에 떨어지고 그분을 자주 배반한다. 이를 미리 내다보신 그분은 베드로에게 던진 질문을 통하여 사랑의 급수를 낮추시면서 오늘도 일선 사목자들에게 당신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신다.
“너 나를 좋아하느냐?” 이 사랑의 확인은 중요하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목자라면, 그분이 그토록 몸바쳐 순수하게 사랑하던 양떼를 똑같이 아끼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정태현 갈리스토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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