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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호세아: 너는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호세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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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21 조회수4,175 추천수1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너는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호세 1,2-9)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호세아서는 맨 앞에 나온다. 그러나 연대순으로 보면 호세아가 아모스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의 활동 시기는 아모스보다 10여 년 늦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한 예언자이다. 그가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연대는 750년경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서진 정책을 폈던 아시리아 제국에 주권 침해의 위협을 받았고, 732년에 아시리아의 종속국이 되었다. 그뒤 722년 이집트의 사주를 받아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비참하게 패망하고 말았다. 이때 호세아의 예언직도 끝난 것 같다.

 

(구약성서 새번역) 1. 2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짓을 하기 때문이다.” 3 호세아는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자 4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이즈르엘이라고 하여라. 머지않아 내가 이즈르엘의 피를 물어 예후 집안을 벌하고 이스라엘 집안의 왕조를 없애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날에 이스라엘의 활을 이즈르엘 골짜기에서 꺾어버리리라.” 6 고멜이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자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졌다.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하여라. 내가 더 이상 이스라엘 집안을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 그러나 유다 집안은 가엾이 여기고 주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을 구해주리라. 그렇다고 활이나 칼이나 전쟁, 군마나 기병들로 그들을 구해주지는 않으리라.” 8 고멜이 로-루하마에게 젖을 뗀 다음에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9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여라. 너회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호세아 예언직의 가장 큰 특징은 부부생활이라는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도 모든 이 앞에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녀들마저도 그의 예언직에 연루되었다. 말하자면 호세아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헤아려지지 않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위기에 처한 하느님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는 데에 공개적으로 내맡겨진 셈이다.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여라.’는 말씀도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 창녀는 단순히 돈 때문에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풍산신 신전의 종교적 창녀였다. 풍산신 숭배를 신랄하게 고발해야 할 예언자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풍자적인가! 이 신전 창녀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였고, 이들을 빼내려면 상당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호세아는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 가운데 한 여자를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신전에서 습관적으로 행하던 풍요 다산의 성행위를 못 잊어 자주 호세아의 품을 떠난다. 그때마다 호세아는 아내를 찾아 다시 데려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한 여자의 지아비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끊임없이 부정을 저지르는 아내를 돌로 쳐죽이거나 쫓아내지 않고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세아는 사회 전체의 질서와 안녕을 위하여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외친다. ‘나의 이 비참하고 비정상적인 혼인생활이 바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와 똑같다.’라고. 그런데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가 어떻게 호세아와 신전 창녀 사이의 혼인 관계에 연결될 수 있는가?

 

첫째, 다른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늘 시나이 계약과 연결시켰는데, 이 계약의 핵심은 ‘너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호세 2,25)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 선언은 바로 혼인 서약의 일반적인 정식, ‘이 여자는 나의 아내이고, 이 남자는 나의 남편이다.’라는 선언을 상기시킨다. 둘째, 이스라엘이 시나이 계약을 깨뜨리게 되는 결정적인 과오는 주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풍산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이 풍산신의 이름 바알은 히브리말로 ‘남편’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김으로써 본 남편을 낯선 남편으로 바꾼 셈이 되었다. 호세아는 ‘바알’이라는 이름을 하느님께 적용하거나 인명으로 사용하는 것(예컨대 ‘여룹바알’, ‘이스-바알’)을 엄격하게 금지한다(2,18 참조). 셋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늘 자애와 성실로 대하셨다. 인간사에서 사랑과 성실이 가장 깊이 표현되고 절실히 요구되는 관계가 바로 남편과 아내 사이의 혼인 관계가 아닌가!

 

호세아의 비정상적인 혼인 생활은 역사적 사실성을 배제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호세아가 아내로 맞아들인 여자의 이름, ‘디블라임의 딸 고멜’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으며 예언자 자신도 이 이름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자가 낳아준 두 아들과 딸의 이름은 상징성을 갖는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즈르엘이다. 이즈르엘은 예후가 오므리 왕조에게서 왕권을 찬탈하려고 아합의 아들 요람 임금과 이세벨, 그리고 아합 집안의 모든 사람을 죽인 곳이다. 아합 집안을 징벌한 예후를 우호적으로 평가한 열왕기 저자와는 달리, 호세아는 예후의 이즈르엘 학살을 여로보암 2세 통치 말엽에서 사마리아의 멸망까지 이어지게 될, 피로 얼룩진 정변의 전형으로 보고 단죄한다.

 

둘째 아이는 딸이었는데, 주님께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히브리말로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여자’라는 뜻의 로-루하마라 부르게 하셨다. 그분이 더 이상 이스라엘 집안을 가엾이 여기거나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가 젖을 뗀 다음에 곧바로 셋째 아이가 들어섰다. 이번에는 다시 아들이었다. 주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말로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의 로-암미로 지으라고 하셨다. 그 이유를 그분께서는 이렇게 밝히셨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 주님의 자비를 얻지 못하고 그분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시나이 계약을 깨뜨리고 그 계약이 요구하는 사회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기(4,1-3)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하느님”(탈출 20,2)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기며 가나안의 이 풍산신이 그들에게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마련해 줄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을 아껴주시고 이 백성에게 곡식과 햇포도주와 금과 은을 주시는 분은 그들의 주 하느님이시다(2,9-10).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은”(6,4) 불성실한 회개와 피상적인 신의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이런 회개와 신의는 더 이상 음식으로서 가치가 없는, “뒤집지 않고 구운 부꾸미”(7,8)와 같고, 열매를 잘 맺지만 그 열매가 결국 풍산신을 위한 제단과 기념 기둥들로 드러나는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10,1)와 같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참 사랑과 신의이다. 이 사랑과 신의 안에는 물론 사회 정의의 구체적 실천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배반과 불충 앞에서 고뇌하신다. “내가 그들을 저승의 손에서 구해야 하는가? 내가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해야 하는가? 죽음아, 네 흑사병은 어디 있느냐? 저승아, 네 괴질은 어디 있느냐? 내 눈은 연민 같은 것을 모른다”(13,14). 그러나 자식을 버리는 것은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며, 백성을 저버리는 것은 그 백성을 태동시킨 신이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선언하신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브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11,8-9).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꾀어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달랜다. 그 옛날 이집트에서 빼내와 시나이 광야에서 계약을 맺었듯이 그분은 예리고 근처의 아골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새 계약을 맺고자 하신다. 그날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두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고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고 부를 것이며(2,18),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아내로 삼으실 것이다(2,21). 또한 호세아 자식들의 저주받은 이름들이 저주에서 풀릴 것이다. “땅은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에 응답하고 그것들은 이즈르엘에 응답하리라. 나는 그를 이 땅에 심고 로-루하마를 가엾이 여기리라. 또 내가 로-암미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그는 ‘저의 하느님!’ 하고 말하리라”(2,24-25).

 

호세아서가 갖는 힘과 매력은 이 책이 인간 정서의 깊은 내면과 인간 관계의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와 인내, 자비와 성실한 사랑을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정태현 갈리스도(익산 성 글라라 수도원 거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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