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45: 전쟁의 그림자 - 평화의 도시에 감도는 전쟁의 기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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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2-20 | 조회수3,905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45) 전쟁의 그림자 ‘평화의 도시’에 감도는 전쟁의 기운
- 로마인은 당초에는 반유대적인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기원후 60년경에 이르면 이러한 생각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서서히 로마 제국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벽 밖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 칸막이처럼 지은 담장은 그 안쪽이 원칙적으로 유대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한 전쟁에서 승리했다. 로마 제국내의 모든 백성들이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이집트의 최대도시 알렉산드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황제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바치려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에 반발한다. 제단은 유일신 하느님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황제를 위해 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단으로 몰려가 그 제단을 부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격분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정상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마음먹는다. 그런데 그 처방이 극약이다.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예루살렘 신전 안에 세우라고 명령한 것이다. 처녀가 능욕당하는 것 이상으로 큰 수치스러움을 안겨 주겠다는 의도다. 물론 유대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유대 총독 관저로 몰려가 신을 모독하지 말아 달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자칫하면 유대민족의 총궐기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유대 총독은 안절부절못했다. 황제의 명령을 시행할 수도, 시행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대 총독이 선택한 것은 ‘시간벌기’였다. 가능한한 시간을 끌면서 상황을 주시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제우스 신상을 만들긴 만들되, 가능한 천천히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사실을 들은 칼리굴라 황제는 또다시 격분했다. 즉시 유대 총독에게 자결을 지시하는 명령서를 보냈다. 황제의 명령을 시행하지 않은 죄목이었다. 하지만 유대 총독은 죽지 않아도 됐다. 명령서가 유대 총독에게 도착하기 전에 황제가 암살당한 것이다.
로마 황제와 유대인들의 전면 대결은 이로써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칼리굴라에 이어 황제에 등극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일단 유대인들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즈음해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서서히 제국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로마인은 당초에는 반유대적인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기원후 60년경에 이르면 이러한 생각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당시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의 독특함, 다른 민족과 융화하지 못하는 특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일단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면 싫어하는 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 보이기 마련이다. 그가 역사서에 남긴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에 대한 당시 로마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할례는 유대인과 타민족을 구별하기 위한 의식이고, 일신교는 다른 신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생겨난 신앙이며, 병역이나 공직을 거부하는 것은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인구를 늘리는데 열심인 것은 타민족을 앞지르기 위한 생각에서 나왔고, 인간의 형상을 본뜬 신상을 우상숭배라고 부르며 거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경멸이고, 춤을 추지 않고 운동 경기도 없는 유대교의 종교의식은 음울해서 일생을 절망하게 한다. 타종교를 믿는 이들과 결혼을 금지하는 것도 유대인의 폐쇄성을 드러낸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유대인들이 우리에게 어려운 존재인 까닭은, 제국의 다른 주민과 유대인은 다르다는 그들의 집요한 주장 때문이다.”
로마가 생각하는 자유와 유대인들의 자유는 달랐다. 로마인에게 자유는 평화와 법에 의해 보장된 질서 속에서 각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는 하느님에 의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불만이 서서히 쌓여갔다. 특히 펠릭스, 페스투스, 알비누스, 플로루스로 이어지는 역대 유대 총독들의 악정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이들 네 사람이 유대 총독을 지낸 것은 서기 52년부터 66년까지 14년 동안이다. 특히 알비누스 총독은 저지르지 않는 악행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 총독은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을 괴롭혔다. 뇌물을 받고 강도들을 풀어 주었고, 의사표현의 자유가 사라졌으며 독재적 억압이 이어졌다.
그나마 알비누스의 악행은 나은 편이었다. 그의 악행은 비밀리에 이뤄졌지만 후임 총독 플로루스는 공개적이었다. 대낮에 도시를 약탈했으며 수많은 백성을 살해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로마에 탄원하고 이웃한 시리아 총독에게 몰려가 고발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유대 총독은 자신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길 원했다. 말하자면 반란을 유도한 것이다. 그래야 로마 상부로부터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질책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정의 강도는 갈수록 심해졌다. 지도자가 작정하고 반란을 유도하는데, 견딜 수 있는 백성은 없다. 예루살렘에서 ‘시카리파’라는 자객들이 등장했다. 시카리파는 이들이 몸에 지니고 다닌 짧고 구부러진 칼의 이름 ‘시카’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곳곳에서 친로마적인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했으며,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대낮에도 살인을 자행했다. 이들에게 의해 대 제사장이었던 요나단이 살해 됐으며, 이로 인해 유대 사회는 불신이 팽배해졌다. 또한 곳곳에서 거짓 예언자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는 흉흉했다. 이집트 출신의 한 거짓 예언자는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로마 주둔군을 습격하고 자신이 주권자가 될 것이라고 외쳤다. 바오로 사도도 한때 이 집단의 두목으로 오해를 받은 일이 있다(사도 21,38 참조). 이러한 혼란은 유대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카이사리아에서는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화약고다. 평화의 땅에 서서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100만여 명의 유대인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전쟁이 이제 곧 시작된다.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17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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