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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51: 이슬람 제국 안에서의 유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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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31 조회수3,949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51) 이슬람 제국 안에서의 유대인들


고립무원에 빠진 유대인들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피신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반겨주는 곳은 없었다. 사진은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 앞에서 코란을 읽고 있는 이슬람교도.

 

 

인류의 영, 정신, 문화 시계는 500년 단위로 자명종을 울리는 것일까.

 

‘새 계약’(예레 31,31-34)을 선포한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500년경이다. 유대교의 기원이 엿보이는 것도 이 시점이다. 그런데 이 시기, 인류는 엄청난 영적 정신적 진보를 전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이뤄낸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유럽의 그리스에서는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활동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시기가 일치한다.

 

그런데 500년 후, 당시 문명 지도로는 세계의 중심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에서 참 진리가 선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따르며,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또 500년 후, 이슬람교가 생겨난다. 이후 서기 1000년, 1500년, 2000년 등 500년 단위로 이어지는, 인류의 영적 정신적 문화적 생채기, 혹은 도약과 변화에 대해선 뒤에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일단 여기선 마호멧 또는 마호메트, 모하메드 등으로 불리는 무함마드(Muhammad, 570~632)의 등장과 그로 인한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해 주목하려 한다. 무함마드가 제창한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은 순식간에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에스파냐(스페인)를 비롯해 그리스도교의 텃밭이었던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전역이 무슬림 수중에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무슬림의 정복전쟁과 무슬림 사회의 선진화에 협력했다. 그 대가로 유대인들은 자비로운 무슬림 지도자들의 환심을 얻어낼 수 있었다. 실제로 십자군에 의해 유대인들이 고통받던 그 시기, 이슬람교의 중심도시 바그다드에선 4만여명의 유대인들이 28개의 회당과 10개의 랍비 학교를 세웠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선 유대인 대학이 설립됐으며, 그 결과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하지만 이슬람교에는 지하드(성전, 聖戰)라는 개념이 있다. 가톨릭 신앙인들의 십자군에 대한 광적인 열광(11~13세기)은 지하드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지하드는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종교적 의무를 말한다. 원래 칼에 의한 지하드 외에도 마음과 펜, 지배에 의한 총 4가지의 지하드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칼에 의한 성전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이슬람법에는 성년이 된 모든 남자 이슬람교도는 지하드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참가자에게는 전리품의 분배가, 순교자에게는 천국의 행복이 약속된다. 문제는 이 지하드가 종식되는 시점은 모든 세상이 이슬람교에 복종할 때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슬람에 복종되지 않는 세력이나 민족, 국가가 단 하나가 있더라도 계속되는 것이 지하드다. 이 점에서 이슬람교는 애초에 포용적인 종교가 아니다. 이러한 비포용이 이제 유대교인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근본주의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이 무함마드를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 낸다. 그들은 다혈질이었고, 과격했다. 그들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유대인들이 박해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정적 위기는 1013년에 찾아온다. 베르베르 무슬림(무어인)들이 스페인 지역 이슬람 제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유대인들은 바람 앞 등불 처지가 된다.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 수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다른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에서도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됐다.

 

무슬림들은 또 유대인들을 구분하기 위해 늘 몸에 노란색 표시를 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터번을 두를 때 흰색 혹은 검정색이 아닌 노란색을 사용해야 했다. 터번을 두르지 않을 때는 노란색 허리띠를 반드시 매야 했다. 유대인들은 또 회당을 만들 수 없었고, 돈이 많아도 무슬림 노예를 부릴 수 없었다. 심지어 말을 타고 다닐 수도 없었다. 종교생활을 드러내 놓고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1146년에 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북아프리카 아틀라스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이슬람 근본주의는 알모히드 왕조를 탄생시켰는데, 이 왕조가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탄압에 나선다. 유대인은 개종과 죽음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유대인들은 이제 아주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역활동도 금지 당했다. 1198년 예멘에서는 유대인들이 통치자의 알현 장소에 강제 소집돼 일괄 개종을 강요당했고, 개종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참수됐다.

 

1121년 무슬림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의 공문서 기록이다. “유대인 여인들은 작은 종을 옷이나 신발에 착용해야 했다. 잔인한 무슬림 남자들과 여자들이 온갖 저주와 모욕을 퍼부으며 유대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각각 다스렸다. … 바그다드의 거리에서 군중들과 젊은이들에게 구타당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국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무슬림 전사들의 정복전쟁을 돕던 그들이 이제 다시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 것이다.

 

당대의 연대기 저자이자 랍비인 ‘아브라함 이븐 다우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시 그리스도교도에게 스스로를 의탁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이 (무슬림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 사회에 선진 아랍 문명을 전하는 등 긍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들의 친밀한 관계는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사회 안에서 유대인들의 가장 큰 첫 통곡은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095년 겨울이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14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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