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지혜문학의 핵심사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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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6 | 조회수5,050 | 추천수1 | |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지혜 (7-11) : 지혜문학의 핵심사상(1-6)
지혜는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것
어렸을 때 난 사과를 잘 먹지 못했었다. 문제는 나만 안 먹으면 될 사과를, 괜히 남까지 못 먹게 하고, 말을 잘 안들을 때는 화를 내거나 작은 주먹을 휘둘러 폭력을 행사한다는데 있었다. 모든건 다 「백설공주」 때문이었다. 백설공주는 계모가 준 독사과를 먹고 저주에 빠지게 되는데, 이 충격적인 장면을 읽은 이후, 나는 더 이상 사과를 먹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목에 걸릴까봐였고, 나와 백설공주를 혼동한 못 말릴(?) 공주병 때문이었다. 물론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사과 먹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은, 지네들이 무슨 백설공주라고,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과는 백설공주와 백설공주 「같은」 나만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어 해야될 이야기는 다음부터다. 공주는 사과를 깨물고 이내 독이 퍼져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왕자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시신을 궁으로 옮겨가게 되고, 잘못하여 관이 움직이면서 공주 목에 걸린 사과가 튀어나오게 된다. 거짓말처럼 그녀는 살아난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삶의 속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그것 때문에 죽기처럼 힘든 무엇을 목구멍 깊이 박고 살고 있지만, 그 고통은, 목에 걸린 사과를 순간에 토해내듯, 그렇게 어느 순간, 단번에, 그토록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흔하고 진부한 일상 속에 스며있는 「하느님의 지혜」(진리)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에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지혜를 발견한 자는 숨을 죄어오던 독사과를 토해내듯, 자기 삶의 어두운 끝자락을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문학에 대한 입문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이제 우리는 지혜문학이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루게 될 주제들 중, 단 한가지라도 우리 목에 걸린 사과를 빼어내 주는 구원의 도구로 작용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마음이다.
성서가 언급하는 지혜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를 동일개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지혜를 일정하고 고정된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성서가 언급하는 지혜는 매우 다각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탁월하고 명료한 인식을 지혜라고 간주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근동의 지혜는 「우주의 순리에 순응」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신앙」과 연결시켜, 「지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순응」이라 이해한다.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를 투철히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지혜문학이 제시한 「지혜」였던 것이다. 지혜문학 「오경」이라 불리는 잠언, 욥, 코헬렛(전도서), 지혜서, 시라(집회서) 역시 공통적으로 이러한 주제를 부각시킨다. 즉,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을 따라 삼라만상을 다스리고 지탱해 나가는 신적이고 우주적인 지혜(호크마)가 존재하고, 이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정을 한번 해보자. 여름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으면서 날씨가 왜 이렇게 더워, 하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롭지 못하다. 매운맛을 빼면 시체인, 「매운탕」을 먹으면서 왜 이렇게 매운거야, 하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질서에 위배되는 생각과 평가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결국 「불평」이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주어진 삶의 현상과 조건에 대한 적절한 긍정, 그리고 이를 하느님의 뜻하심으로 보고 타인과 자신을 포박하지 말기. 바로 지혜문학 작가들이 제시했던 지혜인 것이다.
백설공주 이야기를 통해 얻은 또 다른 지혜 하나. 어렸을 때는 아무 동화책이나 보여주면 안 되요. 사과 먹는 다른 친구들을 못 살게 굴 수도 있으니까. 그럼 어른이 된 다음에는 상관없지요. 단 공주병 증세를 보이는 어른들은 안 된답니다! 저요? 지금은 사과 잘 먹습니다. 없어서 못 먹지^^.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지식과 지혜, 그 차이점
구약성서의 지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구분해야 할 것은 「지식」과 「지혜」이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의 대사회적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식인 우월주의」의 표면화일 것이다. 명문 대학의 인기 학과가 줄 수 있는 사회적인 보장에 부모들은 열광하고, 이 열광주의는 청소년들을 아무도 빼내 줄 수 없는 어둠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에 대한 경악과 부정의 목소리도 높지만, 진정한 반성은 방기된 채 여전히 우리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질과 양에 따라 그 사람을 등급 매기는 데 익숙해져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지혜로운 사회」가 되었느냐, 라고 묻는다면 모두는 고개를 절레 흔들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이렇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이들의 차이점은 한자를 통해서도 제시된다. 두 단어 모두 「지」로 시작되지만, 지식의 지(知)는 화살을 뜻하는 시(矢)와 입을 뜻하는 구(口)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식」이 자신이나 타인의 입에 화살을 쏘아대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지혜」의 「지」는 지(知) 밑에다 일(日)을 더한다. 즉, 「지식」을 보다 밝고 떳떳하게 사용할 때 정당한 「지」(智)가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 의식 활동의 가장 중요한 단초는 그 앎에 대한 「경외」(두려움)라는 것이다. 지식을 잘못 쓰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고, 지(知)는 이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지(智)가 된다는 성숙한 책임감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서는 모든 「지혜의 시작을 두려움」으로 보고 있다.
지혜와 두려움
신에 대한 경외-두려움은 고대 근동의 문학과 제반 종교 현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사실 고대사회일수록 초자연 앞에 갖게 되는 경외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성서의 「하느님-두려움」에 대한 주제는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에 종교적인 특성이 맞물려 발전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을 두려워함은 행복이요 영예며, 쾌락이요 환희의 극치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과 희열을 맛보며 수를 누린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삶의 끝이 좋으리니 죽는 날에 축복을 받으리라』(집회 1, 11~13). 두려움은 경외와 신뢰, 사랑에서 나온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신선한 긴장감을 그만큼 상실했다는 것이고, 이로 인한 일종의 방심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느님의 지혜」를 믿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시작이며,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다. 다른 말로하자면 신이 내게 부여한 삶을 그분의 뜻을 경외하기 때문에 긍정하고 수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자는 질문할 것이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역시 하느님의 뜻이라고 긍정해야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욥기에서 전적으로 다루게 될 주제이지만, 여기서 잠시 그 대답만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답은 「그렇다」이다. 지혜문학적 관점에 의한다면 「고통은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교육적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혜문학은 고통을 축복으로 이해한다. 하느님과 삶의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특혜가 고통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그 절대적인 예를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 더 깊이 설명하도록 하자.
두려움없는 얼굴
얼마 전 출판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힐라리 여사의 책 표지를 본 적이 있다.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화려한 웃음이 신기했다. 전 세계가 야유를 퍼부었던 남편의 스캔들을 겪은 아내에게 그런 화사함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해서였을까. 하지만 표지를 물끄러미 보면서 나는 이내 생각을 수정하고 말았다. 두려움 없는 얼굴은 어쩌면 두려움을 정면에서 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진실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미소가 치밀하고 정교하게 위조된 것일지라도….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난주에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굴지의 재벌을 비롯하여 연일 보도되는 자살 소식 속에 정말이지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한국이라는 이 병든 사회를 붙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상실」에서 온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수용하지 못하고 승복하지 못하는 것은, 잃어버릴까봐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나를 「약자」로, 「억압받는 객체」로만 뇌리 속에 입력시키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종의 종속심리일 수 있다. 즉, 나는 그저 「타자」일 뿐 주체적 삶을 살지 못하고, 무엇을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바로 그 상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리고 내 삶의 주체로 상정해 놓고 있을 때 모든 것은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지혜문학은 우리가 정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나 「사건」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뿐임을 명시하고 있다. 타인과 주변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을 비겁하고 치졸하게 만들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받아들임과 수용, 그리고 용기를 전해준다. 하느님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경험 위주의 지혜
이제 지혜문학의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려보자. 구약성서 지혜는 철저히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사실적 지혜였다. 즉 이론적 체계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발생한 지식을 지혜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가 지식사회는 되어가고 있을지언정 정작 지혜로운 사회는 요원하기만 함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지식인」이라고 해서 곧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험의 부족」에 있다. 도서관이나 대학강단은 세상에 「대하여」 알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세상「을」 보고 체험하게 하지는 못한다. 무엇에 「대하여」 아는 것과 무엇「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결국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은 지식인들은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정치-사회적 현안들은, 지식인이며 동시에 지혜로운 인재와 지도자의 부재에서 발생한 것들이라는 점, 아마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들음의 신학
이러한 맥락에서 실제적인 경험의 중요성은 타인, 현자들의 경험에 대한 「경청의 자세」를 부각시키게 되고, 이는 『들어라』라는 주장으로 특징지어진다(잠언 1, 8. 33 ; 4, 10 ; 12, 15 등). 1열왕 3, 9에서 솔로몬은 그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도록 『듣는 마음』(들을 「귀」를 달라고 하지 않고, 들을 「마음」을 달라고 한 부분에 주목하라)을 달라고 청한다. 듣기에 실패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길은 그의 눈에 옳아 보이지만, 충고를 듣는 사람이 현명하다』(잠언 12, 15). 사실상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강조점을 인간의 오관(五觀)과 연결시켜 설명하자면 「봄」(示)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죄 이후 죄로 인해 손상된 인간의 눈은 심하게 변질되었고, 결국 부끄러움과 수치만을 발견하게 된다(창세 3, 7 참조). 이후 모세와 예언자들은 인간의 눈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한계, 그리고 그 문제점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발한다.
사실 여러 예언자들의 신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간의 시각」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장님과 관련된 소재들 역시 이런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지혜문학에서는 그 중요성을 「들음」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자신의 봄과 생각만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고, 더욱 이를 근거로 무분별한 고집을 내세운다면 모순적이고 불편한 삶만을 주변에 재생산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개방」과 「경청의 자세」야말로 나 자신과 나의 위상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방식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이것이 곧 지혜문학이 강조한 지혜의 길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2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질서에 대한 추구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시골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웃지 못할 실수를 범하게 되곤 한다.
몇 달 전의 일이다. 급하게 약국을 찾다가 겨우 찾아낸 곳이 있었다. 외양이 너무 허름해서 이런 집에서 파는 약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갔다.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던 것은 약을 주문하면서부터였다. 약 이름을 들은 주인 아저씨의 눈빛과 어투가 돌연히 바뀌더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없어요! 너무도 단호한 부정에 아픈 데가 더 아파지는 듯했다.
마음이 상한 채로 궁지에 몰린 나는 소비자는 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규범을 「거창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로서의 공식적인 입장(?)을 똑부러지게 피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약국에 그런 평범한 약이 없으면 어떡해요? 약국이라고 간판을 내 걸지 말던가! 이에 아저씨가 하는 말. 이보슈, 여기는 약국이 아니여, 농약 파는 집이랑께…. 깜짝 놀라 밖의 간판을 보니 「농약」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연히 들어왔다. 농약을 파는 약국이 따로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고, 급한 마음에 「약」 자만보고 무작정 들어간 거였다.
지혜와 질서
성서의 지혜는 「질서에 대한 추구」를 내포하고 있다. 즉 세상에는 하느님이 이미 설정하신 기본적 질서가 존재하고 이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농약 가게에는 농약만 판다. 거기서 사람 먹는 약 달라고 하면 비웃음과 놀림을 받는 건 당연하다. 사람 살리는 약은 없고 죽이는(?) 약만 있는 곳이라는, 그 곳만의 질서를 어기고 무시한 댓가이다. 결국 지혜롭게 사는 길은, 자장면 먹으면서 짬뽕 맛을 기대하는 「자기 모순」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코흐(Koch)의 연구가 흥미로운데 그는 『운명을 산출시키는』(destiny-producing) 행위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성서상의 징벌이나 재앙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행위와 결과는 심리적으로 연루되어 있어, 악한 행동을 하면 악한 결과가 오고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 질서(양심)에 따라 성실한 과정을 통과한 계획은 「축복」이라는 결과를 낳고, 반대의 경우는 「저주」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지혜」와 「질서」의 관계는 창세기 초장에도 잘 제시되어 있다. 혼돈과 무질서로부터는 절대로 지혜가 등장할 수 없고, 세상을 창조한 말씀(지혜)은 「질서」에서부터 유래한다. 어두운 혼돈의 상태(창세 1, 1~2)를 「분리하고」 「가르시면서」 창조는 진행되기 때문이다(창세 1, 3~10). 혼돈과 어두움을 구분하는 「질서」로부터 「지혜」는 생겨나고, 이는 곧 「생명」의 시작(창조)과 연결되고 있다. 생명의 시작을 지혜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관련되고, 지혜를 「생명의 샘」(잠언 13, 14), 「생명의 나무」(잠언 3, 18) 등으로 표현하게 되는 근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구약성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혜를 얻는 것」은 곧 「생명을 얻는 것」이다.
숙녀 지혜(지혜의 인격화)
이러한 맥락에서 지혜문학의 중요한 신학인 「숙녀 지혜」가 등장한다. 숙녀 지혜란 지혜를 여성으로 인격화한 것인데, 이러한 신학은 위에서 설명한 부분과 면밀히 연관되어있다. 즉, 지혜는 질서를 통해서 오고 이를 통해 창조(생명)가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생명을 산출하는 여성 고유의 특권과 연결시킨 것이다. 여성이 생명을 산출하듯, 지혜는 생명을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숙녀지혜)에 은유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혜를 따르는 사람은 새로운 존재, 그 새 질서 안에서 새로 태어나고 주변의 것들을 생명으로 넘치게 한다. 이러한 숙녀 지혜의 모습은 욥기 28장; 잠언 1.8.9장; 바룩 3, 9~4, 4; 집회 24장; 지혜 7, 7~9, 8장 등에 등장한다.
진정한 여성성은 생명과 삶의 「생산」에 있다. 주변을 「살아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저력! 왜곡되고 손상된(혹은 비하된) 여성의 모습만을 답습하고 있는 이 사회에 지혜문학이 제시하는,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여성의 참 모습이라 하겠다.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3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지혜의 발견은 곧 생명의 발견
지금도 방송을 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 휴대폰 광고 중 마음에 드는 카피를 본 적이 있다. 『당신은 가진게 참 많은 여자입니다』라는 카피였다. 고서들로 가득 찬 서재와 멋진 텐트까지 가지고 있는 광고 속의 그녀는 분명 가진게 많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 광고가 좋아진 것이 그 멋진 서재와 텐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질적으로는 가진게 없지만, 그리고 그녀처럼 많은 여행과 만남들로 그리워할 추억 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못하지만, 살아갈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생을 경외하며 살고자 하는 열정과 순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진게 많은 여자」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녹아있는 지혜(하느님)의 발견은 곧 생명의 발견이요, 행복의 발견임을 몇 주전부터 언급해오고 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발견이, 우리 모두를 가진게 많은 이들로 해준다는 것, 이번 주에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주제이다.
지혜의 신격화
지난 주 우리는 「숙녀 지혜」 라는 지혜문학 특유의 신학에 대하여 알아본 바 있다. 이 독특한 주제는 하느님의 속성과도 연결되어 발전하게 되는데, 생명을 준다는 의미에서 지혜를 여성에 은유하고, 동시에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숙녀 지혜 개념이 지혜에 대한 「인격화」였다면, 지혜를 하느님으로 보는 시각은 지혜에 대한 「신격화」 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시각은 신약성서에서 「로고스」(말씀) 개념으로 발전하는데, 창조 때 계시던 「지혜」를 「말씀」 곧 「로고스」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 내내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말씀」으로 지칭하는 것 역시, 이러한 지혜 문학적 시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지혜가 거처하는 곳
지혜가 거처하는 곳은 「마음」이다. 즉, 지혜를 갖게되는 것은 생명을 얻게되는 것이고, 결국 이는 생명의 중심인 마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 속에 현대인들이 가장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은 「신의 부재」 혹은 「침묵」에 대한 것이다. 절망과 분노로 흔들리며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공의(公儀)하심을 갈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혹은 「숨어 계신」 듯한 하느님을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비슷한 딜레마는 이미 욥기에서 잘 제시된 바 있다. 욥은 무죄한 이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하느님을 고발하며 그분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고집한다(9, 32~35 ; 13, 3. 16. 22 ; 16, 18~22 ; 31, 35~37 등). 그러나 처절한 고투 후 그가 마주한 것은 「침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 무거운 「침묵 안에 함께 하고 계시며 고통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었다.
결국 하느님의 부재-침묵에 대한 주장은 「마음 안의 지혜」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의 오만한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닐는지….
지혜와 길
성서에서 (경험)지혜와 연관된 「길」을 의미하는 단어는 「데레크」(derek)인데(잠언에 75번 정도 등장), 이 길은 삶을 충만하게 하고 주님과의 계약적 관계성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길에 대한 지혜문학적 배경은, 하느님과 구원에로 도달하게 하는 길이자 지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던 율법(십계명을 비롯한)과 공통분모를 갖는 것이었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도리)의 제시라는 맥락에서 토라(율법서)와 지혜문학에서의 「길」 주제는 서로 유사한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자신이 걸어야할 「길」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 길에서 이탈할 때 생긴다. 결국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설사 그 길이 이전에 걸었던 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독하고 먼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나의 내면으로부터 발견해내고 수용하는 마음일 것이다. 독자들 중, 이에 긍정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당신은 지혜를 일찍 들여다 본 사람이며, 그러므로 「가진게 참 많은 사람」이십니다! [가톨릭신문, 2003년 9월 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성서 지혜문학과 다른 문학의 차이점
지난 몇 주간동안 우리는 지혜문학이 부각하고자 했던 주요주제들을 살펴보았다. 언급되었던 내용들은 지혜문학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다시 한번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 주에는 지혜문학의 입문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성서 지혜문학과 다른 유다 문학 주류들(율법서, 예언서 등)이 보여주는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지혜문학을 다른 문학과 차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지혜문학에는 다른 여타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던 단골 메뉴들이 부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혜문학 작품에는 「성조들과의 약속」, 「출애굽」, 「시나이 계약」 등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욥은 자신의 탄원을 「계약의 하느님」 혹은 「출애굽의 하느님」께 호소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느님』(엘 샤다이)께 호소한다(1~2장, 42장). 백성에 대한 개념도 「계약의 백성」이라는 의미보다는 일반적인 군집(집단) 명사로서의 의미가 더 짙다. 왕도 기름 부음 받은 이(즉, 메시아)로서 고백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지혜)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서 강조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즉각 제기하게 된다. 지혜문학에는 이스라엘이 고백해왔던 신앙과 하느님이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는 것일까? 답은 물론 아니오, 이다. 지혜문학안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유다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하시는 역사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축소되어 있는 대신, 「인간의 일상 속에 체험되고 내재하시는 하느님」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지혜문학은 구원하시는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이라는 전통적 신관보다는, 전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질서를 유지하시며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함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신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문학은 기존의 전통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의 주인으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실존적으로 체험하는 이상, 과거 출애굽 사건의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을 굳이 따로 기억하고 고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입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살」과 「살자」
이번 여름은 기나긴 장마와 호흡마저 방해하는 무더위에 모두를 지칠 대로 지치게 하였다.
연일 보도되는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이 그랬고, 그로 인해 파급되는 잔인한 경제 위기가 그랬으며, 마음을 깊게 조여오던 자살 행렬이 그랬다. 지혜문학을 통해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광기와 폭력만이 반복되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언제가 친구가, 『자살이라는 말을 거꾸로 해봐』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중심을 잃은 채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던 내게 작은 눈물과 함께 전해진 그녀의 우정어린 충고였다.
『…살자』
그 어떤 설명 없이도 삶의 극단적인 모순을 너무도 잘 보게 해주는 말이었고, 또한 그러한 모순과 극단성이야말로 사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수용해야하는 생의 진실임을 깨닫게 했던 잊지 못할, 아니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잊지 말아야할 진리였다. 단순하게 뒤집어 보면 그토록 편안하게 넘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게 풀고있는지….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결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 이상 도망갈 데 없이 막다른 곳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사람에게 자살은 당연히 찾아오는 절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이 살기를 원하시는, 아니 인간을 살리시는 지혜이다. 자살과 두려움, 공포에 스스로가 소진되기 전에 분명히 물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지혜를 진심으로 간청해 보았는지에 대한 정직한 성찰일 것이다. 어쩌면 자살은 자신의 능력과 삶에 집착한,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이 보이는 자기 중독증의 비극적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잔인했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해보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3년 9월 2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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