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부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가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사순부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죽음을 깨닫는 것은 삶을 아는 것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0-29 | 조회수2,333 | 추천수0 | |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한다.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신단다.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데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다면, 가까이 하기엔 또는 너무 먼 당신이 아니신가?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빠’라고 부르셨으며, 우리도 그렇게 부르도록 해주셨다. 더 친근하고 가까운 분으로 말이다. 집에서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부담없고, 친구같이 친하게 부르게 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가?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느님이라는 우리말도 ‘하늘’에 ‘님’이 합쳐서 ‘하늘님’, ‘하느님’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하늘과 관련이 있다. 하늘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늘날 천문학이 발달하여 그 움직임과 신비를 많이 파악하고 있지만, 그 무한한 하늘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늘은 미지의 세계이고 인간의 손길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하늘은 비록 공간적 차원이지만, 사람들은 예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만물의 기원이 하늘에서 시작하고 하늘에 대한 신적 존재와 능력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하늘은 하느님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무한하심,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며, 우리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차원, 지상에 머무는 우리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하느님의 차원과 우리의 차원은 그래서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비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차원이 다르고 체급이 다른 것이다. 그 차원에 계시는 하느님,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신 하느님을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실현시켜 주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의 기쁨은 50일간 지속된다고 한다. 곧 부활시기가 7주간을 지내고 50일째 되는 날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여기에 앞서 교회는 40일째 되는 날 ‘주님 승천 대축일’을 기념한다.
이 두 축일은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를 완결짓는 축일이다. 주님의 부활은 승천과 성령 강림과 함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세 축제들은 동시 사건이지만 그 신비의 한 측면과 주제를 나누어 기념하고 거행하는 것이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원래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해당된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서 거행한다. 이날은 4세기경부터 지내왔다. 이미 성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일찍이 교회 전승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님 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극히 간단하다.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으로써 우리도 하늘의 차원으로 승격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날 미사 기도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주님 승천의 의미가 곧 우리의 승천도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 레오 대교황이 이날 강론에서 “예수의 승천은 우리 승천의 예시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하늘 위로 승천하시어 하느님 곁으로 가신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는 전형이요 증표인 것이다.
그래서 화답송은 이렇게 말한다. “환호소리 나는 중에 하느님께서 오르시도다. 나팔소리 나는 중에 주님 올라가시도다. 만백성 너희들은 손뼉을 쳐라. 기쁜 소리 드높이 주님 부르라.” 이렇게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심으로써, 하느님께로 가신 것이며, 우리도 하느님의 영역, 하늘의 차원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1독서에서 명쾌하게 그 대답을 들려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예수께서 떠나가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사랑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하느님께 예수님이 올라가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보자. 예수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듯이 당신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 사랑 실천을 다짐해 보자. 사랑의 힘이 서로 다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 나기정 다니엘 - 신부, 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경향잡지, 2001년 5월호, 나기정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