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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징] 미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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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5,769 추천수0

미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의 의미 (1)

 

 

Q: 갓 신자 생활을 시작한 한 신자가 미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들 하나하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게 물어 왔을 때, 신자 생활을 꽤 오래 한 저 역시 그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습관적으로 신자들의 동작을 따라 하고, 신부님이 행하시는 동작들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 왔음을 알았을 때 참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미사 때 행하는 동작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인간이 천사와 같은 순수한 영적 존재라면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영적으로 직접 전달할 수 있을 터이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말과 몸짓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의사를 상대에게 직접 전하기가 힘듦을 깨달은 인류는 끊임없이 각 지역과 문화에 따라 언어적 표현과 행위적 표현(몸짓)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 습관과 문화가 온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인사하는 방식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이는 방식을 사용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볼에 입맞추거나 악수를 함으로써 반가움을 드러냅니다. 같은 지역,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몸짓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 때의 인사 방식과 지금의 인사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발전한 전례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이스라엘, 곧 팔레스티나에서 시작하여 서양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전례 역시 그 시대, 그 지방의 문화적 요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전례란 것이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지(상징, 언어, 동작)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각 시대의 문화적 요소들이 전례 안에 스며든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전례이기에 20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가 현재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작과 말을 다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중세에 들어와서 인간의 동작이 원래 뜻하던 의미 대신 상징적인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덧붙였기 때문에 중세의 상징적 해석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징적 해석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 남아 있다는 점인데, 여기서 저는 각 동작이 미사 안에서뿐만 아니라 전례 전반에 걸쳐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작의 종류

 

우리 인간의 동작들이 다 똑같은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전례 안에서 행해지는 동작들도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기능적 동작입니다. 즉,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동작들입니다. 예를 들어 성작이나 손을 닦는 행위,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행렬 등이 바로 그러합니다.

 

둘째, 말과 동작을 함께 행함으로써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드러내는 동작입니다. 그러한 동작으로 우리는 참회 기도 때 "제 탓이요" 하면서 가슴을 치는 동작을 들 수 있겠습니다.

 

셋째, 온전히 상징적인 동작이 있습니다. 세례 때 새로 영세받은 이에게 흰옷과 초를 주는 행위, 성찬례(미사) 때 사제가 영성체를 하기 전 성체 조각을 성혈과 섞는 행위가 바로 그러합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전례 동작 가운데 우리는 현재 전례, 특히 미사 안에서 발견되는 동작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합니다.

 

 

성호(聖號)를 그음

 

성호를 긋는다는 것은 성호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로 해석되었으니, 신자들이 성호를 긋는 동작을 하였다는 것은 2세기말의 교부 떼르뚤리아노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동작을 할 때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때, … 일상 생활의 모든 동작마다 우리는 십자가 표시(성호)를 긋는다." 성호 긋는 동작은 사람이나 물건 모두에 대해서 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는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대해서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이마에만 엄지손가락으로 십자를 긋는 양식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아니즘을 반박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를 상징하고자 이마에서 심장으로 그리고 가슴 위 부분을 긋는 현대식의 성호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삼위일체 기도가 첨가되었습니다.

 

성당에 들어설 때 성수를 찍어 십자를 긋는 행위와, 미사 시작 때 사제가 십자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할 때 신자들도 십자를 그으며 "아멘" 하고 대답하는 것은 세례 때의 우리 신앙 고백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바로 성부·성자·성령께 대한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수(聖水)가 세례수를 상기시키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말 역시 세례를 베풀 때 하는 기도문이라는 데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읽기 전 신자들이 모두 이마와 입술, 심장(가슴)에 엄지손가락으로 십자를 긋는데, 이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이마에 긋는 십자 성호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입술에 긋는 십자 성호는 복음 선포를, 가슴에 긋는 십자 성호는 복음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이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 말한 삼위일체 신앙과 연계시켜 해석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일어섬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일어섬은 비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공경의 표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또 다른 의미를 덧붙였으니, 그것은 자신들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갖는 자유를, 종살이에서 벗어난 자유인임을,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때문에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주일과 파스카 시기(부활시기)에 무릎을 꿇지 말고 서서 예배를 보도록 의무화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보다 훨씬 전인 2세기말의 교부(敎父) 떼르뚤리아노가 주장하던 바였습니다.

 

또한 일어섬은 희망과 믿음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이자, 사제직을 수행하는 이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이란, 서품성사를 통해 사제가 된 이들의 직분만을 뜻하지 않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물려받은 모든 신자를 말합니다.

 

성찬례 안에서만 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성서를 읽으실 때 일어서셨다는 복음의 기술(루가 4,16)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서 있는 동작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존경심을 가리킵니다. 알렐루야와 더불어 시작되는 복음 낭독 때 우리 모두가 일어서는 것은 바로 사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서 있는 자세는 또한 마르 11,25(여러분이 서서 기도하려고 할 때에 …)와 루가 18,11-13(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제가 성당에 입당할 때부터 본기도를 할 때까지, 신앙고백부터 보편 지향 기도를 할 때까지, 이외 미사중에 일어서는 것은 사제와 더불어 함께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에 의하면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할 때 서서 하였다고 합니다. [김인영 신부 /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미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의 의미 (2)

 

 

전례 안에서의 동작, 특히 미사 안에서의 동작이 지니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앉음

 

마태오 복음사가의 묘사에 따르면(마태 5,1이하) 산에서 백성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팔레스티나를 위시한 당시 중동 지방에서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 공식 직무를 수행하는 관리, 재판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품위를 갖고 있는 이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 성당들의 모자이크를 보면 자리에 앉아 가르치시는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앉은 자세는 스승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마르 3,31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제자들이 그분 주위에 모여앉아 말씀을 경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앉아 있는 자세는 또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스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작이기도 합니다. 미사 때, 특히 주일 미사의 제1독서와 제2독서 때 신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입니다.

 

 

무릎꿇음

 

누군가에게 용서를 청할 때, 또는 무엇인가 간절히 애원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무릎을 꿇거나 엎드립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엎드리거나 무릎꿇는 자세는 상대에 대한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비를 바랄 때 사용되는 자세입니다. 따라서 이 두 자세가 전례 안에서 사용될 때는,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나의 잘못과 약함을 인정하는 자세이자, 하느님께 간절히 무엇인가를 청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 올리브 동산에서 고통중에 하느님께 기도하실 때 취하신 동작이 바로 무릎꿇는 자세였던 것입니다(루가 22,41). 그런데 공간이 충분하지 못한 성당에서 엎드리는 자세로 기도하기란 사실상 곤란하므로 무릎꿇는 자세가 주로 사용된다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릎꿇는 자세는 고개를 숙이는 자세와 함께 공경을 드러내는 자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사기도문을 할 때 신자들이 무릎꿇는 것은 이제 이루어지는 파스카 신비의 재현에 대해 공경심과 경외심을 드러내면서, 미천한 나이지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의 뜻을 좇겠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일부 본당에서 성당이 비좁다는 이유로 장궤틀을 없애는 일이 있는데, 이는 우리 몸을 이용하여 더욱 간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단 자체를 없앴다는 점에서 잘못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음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의 관행에서 나왔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신적(神的) 존재인 황제를 공경하고 예배할 때 바로 이 자세를 취했었습니다. 처음엔 이 동작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자세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자세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자세의 이교도적 의미가 사라지고 단순히 높은 사람에 대한 존경을 뜻하게 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자세는 주교나 교황에게 하는 인사로서, 나중에는 제대, 십자가, 성인 유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상(像) 앞에서도 한쪽 무릎을 꿇어 경의를 드러내었습니다.

 

11세기에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체 앞에서 이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고, 16세기에 미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다가 결국 1570년의 비오 5세 로마 미사경본 안에 포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유럽식의 인사 자세인 이 동작이 우리 실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기에 한국 교회는 성당에 들어갈 때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우리 풍습에 맞추었다는 점에서 참 잘된 결정이라 하겠습니다. 이전에는 성체를 모시고 나서 제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곤 하였는데, 이제는 성체 앞에서나 제대 앞에서 허리를 숙여 절하거나 양쪽 무릎을 다 꿇고 기도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임

 

고개 숙임은 일반적으로 무릎꿇는 동작과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공경과 겸손한 탄원의 의미, 인간이나 물건에 대한 존경심과 공경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광송을 바칠 때, 강복 때,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할 때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느님께 봉사하는 성직자들에게, 성인의 이름을 거론할 때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대, 십자가를 위시한 성물(聖物)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동작을 사용합니다. 이외에도 참회기도 때 참회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드릴 때 이 동작이 쓰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개를 숙이는 동작은 무릎을 꿇는 동작을 대신한다 하겠습니다. 중세 이래 영광송 때, 니체아 신경과 "거룩하시도다"에서 "성령"의 이름이 나올 때 고개를 숙이는 관행이 생겼는데,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대신 공경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제대, 성상(聖像), 십자가, 성직자, 성체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또한 고백기도 때 참회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감사기도를 바칠 때 성체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고자, 사제의 기도에 참여함을 보이기 위해 사제가 기도를 바칠 때 고개를 숙입니다.

 

 

가슴을 침

 

이 동작은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죄의 뿌리가 바로 심장에 있다는 예로부터의 생각이 이러한 동작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로 눈을 들 생각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루가 18,13).

 

우리가 참회기도의 "제 탓이요" 부분에서 가슴을 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세리의 마음이 되기 위한 것이므로 신중하고도 진지한 마음으로 이 동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 신자들이 성체를 받들어 올릴 때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 가슴을 치기도 하는데, 이는 본래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이며 따라서 전례 안에서 이 순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김인영 신부 /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사 때 이루어지는 동작의 의미 (3)

 

 

Q: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다 보면 신부님이 제대에서 여러 동작을 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니까 어떤 때는 그것이 일종의 마술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동작들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있다면 그 뜻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A: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할 때도 여러 가지 동작들을 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작들이 아무 의미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루어져야 할 동작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예의 없다"는 꾸중을 듣는데, 그것은 각 동작이 나름대로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작은 사람들 사이에 미리 그 뜻이 정해진 일종의 약속된 몸짓 언어입니다. 따라서 각 나라마다 각 민족마다 같은 몸짓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작도 일종의 언어입니다. 사제가 어떤 동작을 취한다 해서 그것이 마술적 힘을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전통적으로 어떤 동작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 때문에 각 동작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이 취하는 동작의 의미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신부가 취하는 자세가 뜻하는 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팔을 벌림

 

현재 우리의 전례를 보면, 팔을 벌리는 자세는 주로 사제가 취하는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팔을 벌리는 자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매달리실 때의 자세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중세 때 미사를 신비적으로 해석하면서 각 동작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던 관행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해석이라 할 것입니다. 팔을 벌리는 자세는 하늘을 향해 내 마음을 들어올리는 자세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추정되어 왔고, 따라서 팔을 벌리는 자세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따라서 초기 교회 때는 사제뿐만 아니라 신자라면 누구나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때 팔을 벌리는 자세로 하였습니다. 일부 본당에서「주의 기도」를 바칠 때 신자들이 사제와 더불어 팔을 들어 기도하는데, 신자들이 전례 안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한 방식으로 권장될 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행렬

 

다른 전례 동작들과 마찬가지로 행렬 또한 기능적 목적과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 예식 때 제대를 향한 사제와 봉사자들의 행렬, 봉헌 행렬, 영성체 행렬, 이렇게 세 번의 행렬이 성찬례(미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각 행렬이 미사를 시작하기 위해 제대로 나아가는 것, 봉헌을 하는 것, 영성체를 하는 것과 같은 기능적 목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세 행렬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성찬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제대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는 세상 종말을 향해 순례하는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세 초기에 만들어진 바실리카 양식(직사각형의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음)의 성당들을 보면 벽에 그림이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제대 또는 제대 위 벽이나 천장에 그려져 있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일종의 종말론적인 행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행렬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안수(按手)

 

야곱이 자기 열두 아들들의 머리에 팔을 얹어 축복하여 주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창세 48,14 이하) 안수는 무엇보다도 축복의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속죄의 제물로 짐승을 가져오면 사제는 그 짐승에게 안수를 한 다음 죄인 대신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출애 29,10), 여기서 안수는 짐승을 가져온 이와 짐승을 동일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안수를 받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직분을 이어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에 드러나 있듯이, 안수는 직무의 전달과 그 직무를 수행할 능력의 전수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안수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세례 때 안수를 해 줌으로써 세례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음을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안수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선물을 뜻했습니다. 축복도, 직무의 전달도, 병의 치유도 모두 성령의 선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미사에서의 안수는 사제가 손을 모아 빵과 포도주 위에 펴 얹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때의 의미는 성령이 빵과 포도주 위에 내려오시어 그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달라는 청원의 의미입니다. 전례학에서는 이것을 에피클레시스(epiclesis)라고 부르는데, 성령을 청하는 기도라는 뜻입니다(저는 이 말을 "성령청원기도"라고 번역했음).

 

 

빵과 성작을 받들어 올림

 

이 동작은 성찬례(미사) 안에서 세 번 이루어집니다. 성찬 제정의 말씀 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받어라. … 받아 마셔라", 감사기도문 끝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마침 영광송 때부터 신자들이 "아멘"으로 응답하기까지, 마지막으로 평화의 인사를 한 다음 "하느님의 어린양 … "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성찬 제정 말씀 다음에 빵와 성작을 받들어 올리는 것은, 이 순간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한다는 신학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보고 싶어하는 신자들의 열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2세기에 빵을, 13세기에는 성작을 들어 올리는 관행이 나왔습니다. 이로써 마침 영광송 때 빵과 성작을 받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성찬례 안에서 이루어진 파스카 신비를 경하하는 의미가 상당히 축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반과 성작을 받들어 올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과 경외심을 끌어내면서, 성체와 성혈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을 드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침 영광송 때의 받들어 올림이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감사기도 끝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신도들이 이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김인영 신부 /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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