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축일]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과 초 축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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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8-01-10 | 조회수3,331 | 추천수0 | |
[이달의 전례] 주님 봉헌 축일과 초 축성
전례적 개관
옛 전례력에 의하면 이 축일은 3월에 지내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성모 취결례 축일’이라고 불리면서 구분상 성모 마리아 축일 계열로 여겨왔었습니다. 그러나 전례력 개정 이후 이 축일의 이름이 ‘주님 봉헌 축일’로 바뀌면서 성모 마리아 축일 계열이 아닌 주님 축일 계열로 편성되었습니다.
사실 1969년까지 이 축일이 가졌던 ‘마리아 취결례’라는 공식적인 이름은 매우 불행하고 오해를 살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리아는 모든 면에서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이 축일의 이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력 개정에서 ‘주님 봉헌 축일’로 불려짐으로써 이 축일은 주님 축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성탄 후 40일째인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은 루가 복음 2장 22-39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성서적 사건이 그 중심을 이루는데, 이 사건에서 중심인물은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의 정결례 규정에 따르면(레위 12,1-8) 산모가 남자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40일간을, 여자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80일간을 불결한 기간으로 여겨, 그 기간이 지나면 새끼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만약에 집이 가난하면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의 제물로 사제에게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제는 야훼께 그 제물을 바쳐 그 여인의 죄를 씻어 주어야 하고 그러면 그 여인은 부정을 벗게 된다.”(레위 12,7) 아울러 출애굽기에 의하면, 첫아들은 주님의 소유로 여겨졌기에(출애13,12) 야훼 앞으로 인도되어서 속전을 내고서 되돌려 받아야 한다.(민수18,16)
이러한 규정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 역시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려갔고, 마리아가 정결의 제물을 바치고 나서 그 아들을 되돌려 받습니다. 이 축일의 기원에 관해서 동방교회(예루살렘)와 서방교회(로마)는 근본 소재를 달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400년경에 나온 에테리아 순례기에 의하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유일한 예수 탄생 축일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40일, 즉 2월 14일에 큰 축제를 거행했다고 보고합니다. 예수 부활 대성당(흔히 ‘예수 무덤 성당’이라고 잘못 불리고 있다.)에서는 장엄한 행렬을 지어 입장한 후 사제와 주교는 루가 복음 2장 22-29의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하는데, 이 화려하고 장엄한 예식은 미사로 마무리 되었습니다.(에테리아 순례기 26장)
순례자 에테리아가 이 축제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는 반면, 5세기 중엽에는 이 축일이 이미 불의 행렬과 연관되어 ‘만남의 축일’로 나타납니다. ‘만남의 축일’로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성부의 성전과 만나고, 성전 안에 사는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를 만나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보여집니다.
서방 로마교회에서는 이 축일이 에테리아 순례기가 나온 이후인 5세기 중엽에 이미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후에 나온 증거에 의하면 이 날 불의 행렬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 행렬이 생기게 된 그 뿌리 역시 이교도 풍습으로 매 5년마다 2월 초에 도시를 행렬했던 옛 이교도 속죄행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이교도적 풍습을 몰아내기 위해 교회 안에서는 촛불행렬이 거행된 것입니다. 따라서 1960년까지 규정했던 보라색 제의는 바로 이 속죄의 성격을 기억토록 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묵상
때때로 많은 사람들은 그날의 날씨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곤 합니다. 잔뜩 찌푸린 날씨나 며칠씩 계속 비가 오는 날엔 기분이 언짢고 침울해지지만, 밝고 맑은 햇살이 화사하게 비추는 날은 자신에게도 밝고 상쾌한 기분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만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밝은 얼굴로 인사하게 합니다. 이처럼 태양이 주는 햇빛은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뿌리 그 이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렵고 곤란한 상태에서 벗어나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면, 우리들은 ‘이제 그 집에도 서광이 비치는구나.’ 하고 말하곤 합니다. 또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가끔은 ‘내게도 언젠가는 볕들 날이 있겠지.’ 라는 말로 자신의 희망을 표현합니다.
분명히 빛은 당연한 것이 아닌 선물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결코 태양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태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만들 뿐입니다. 태양 볕 아래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며칠간의 계속된 찌푸린 잿빛 안에서 숨겨진 햇살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합니까? 자신과 자기 가정 안에서도 또 다른 의미의 햇살이 비추어 서로서로를 잘 이해한다면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대부분의 고대종교에서 태양이 신격화되고 고대 에집트 문화에서 신으로 숭배한 것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많은 따스한 행복들이 결코 자기 노력의 결과만이 아님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들 안에서 구원의 빛을 준비하셨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오늘 우리가 축제를 지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그 당시 성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만백성 앞에 마련하신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그 이후 예수님은 빛에 관한 이 말씀대로 당신이 빛이심을 밝히십니다.
몇 주가 지나면 우리는 새봄의 햇살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면 겨우 내내 움츠렸던 나무에서는 새순이 돋아나고, 물을 머금으며 생명의 활동을 활발히 시작할 것입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꽃나무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풀들도 생명의 색깔을 낼 것입니다. 봄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발걸음도, 살림살이도 밝아지고 가뿐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빛과 만나지 않는 세상 사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느 시인은 기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도란 내 영혼을 태양 빛 아래 내놓는 것이다. 기도에서 중요하고도 유일한 것은 하느님 앞에 마주서서 무엇인가 말씀드리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시도록 하는 데 있다.”
시메온은 성전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열심하고 경건한 생활로써 하느님을 만났다고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의 영혼을 하느님의 태양 아래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생각하는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의 빛을 통하여 나에게 내 삶이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를 향해서 가고, 무엇 때문에 내가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선사하시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찾아나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의 동경과 원의는 오직 하나뿐,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제 방의 책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미술관 그림을 모은 책을 생각 없이 펼쳐 보다가 6세기에 그린 자비로운 사마리아 사람을 묘사한 한 폭의 그림에 제 눈길을 빼앗겼습니다. 땅바닥에는 도둑에 의해 피습당해 쓰러진 사람이 누워있고 그 사람 위에는 자비로운 사마리아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서 묘사한 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밝은 광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태양빛처럼 그는 부상당해 정신을 잃어버린 채 땅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두루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상자를 내려다보면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며 상처를 동여매어 마침내 여관까지 데려다 줍니다.
주님 봉헌 축일 전례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인 묵상기도에서도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찾아 나서기 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참된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빛을 밝혀 나갑시다. 우리도 이제 예수님 안에서 밝혀진 빛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 그리고 자비를 비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밝히는 이 불,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 손으로 들게 되었으며 우리 손 안에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밝히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떠납시다. 비록 힘들고 유혹에 떨어지고, 쓰러지더라도, 힘들더라도, 어둠 속을 걸어가더라도 빛이신 그분은 항상 우리의 길을 밝혀 주십니다. 그분이 비추시는 그 불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월간 빛, 2004년 2월호, 최창덕 F. 하비에르 신부(성바울로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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