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전례의 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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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2 | 조회수1,782 | 추천수0 | |
[전례 해설] 전례의 태동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원 사업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지속되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의 설정은 전례의 설정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활동의 목적인 성화와 하느님의 영광”이 전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 찬송과 영광을 드리며, 그 분과 인격적 만남을 체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의미 있는 삶과 기쁨에 충만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한마디로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頂點)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다.”
예수께서는 처음에 그 당시의 경신례를 따르시면서 그것을 새롭게 발전시키셨다. 그 분은 구약과 그 당시 경신례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전 경신례에 자주 참여하셨음을 성서는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성모 마리아에 의해 성전에서 봉헌되셨고(루가 2,22-29), 축제 때마다 성전을 방문해 성전 경신례에 참여하셨다(루가 2,41; 요한 2,13; 10,22) 그분은 경신례를 부패시키고 있던 허례 허식, 위선, 경신례의 지나친 형식화를 개탄하시면서 경신례 본래의 정신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5,23-24; 12,3-7; 23,16-23). 예수께서는 성전이 하느님의 집이요 기도의 집이며 당신 아버지의 집이기에 장터와 같이 변해 버린 것을 보고 분개하셨고,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기도 하셨다(마태 21,12-17). 또한 예수께서는 유다인 회당에서 바쳐지던 회당 경신례에도 참여하셨다. 그분은 안식일이면 늘 하시던 대로 회당으로 가셨고, 설교도 하셨음을 알수 있다(루가 4,16-28).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요한 18,20). 그분은 당시의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성전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한편,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이며 새로이 재건되리라는 사실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이 재건될 성전이란 부활할 당신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요한 2,19-21).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경신례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경신례를 거부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 분은 이 경신례가 종말에 와 있고, 새로운 경신례가 다른 영(靈)으로 채워질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요한 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경신례의 근본적인 면을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이나 그리짐산에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요한 4,21-24). 이렇게 예수께서는 참된 경신례란 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셨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식이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으로 새로난 사람만이 새로운 경신례를 드릴 수 있다(요한 7,37-39; 4,10 참조).
경신례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와 유다인들의 경신례 이해 사이에는 결국 대립이 생기는데, 그 대립은 스떼파노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스떼파노에 대한 고발은 이렇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사람에게서 나자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전해 준 관습을 뜯어 고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사도 6,13-13). 실제로 스떼파노의 다음과 같은 변호는 그 정점을 이룬다. “성전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사시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 아니냐?’”(사도 7,47-50). 결국 첫 순교자 스떼파노는 구약의 경신례와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된 경신례가 끝나고 새로운 경신례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근본 원칙을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이다.
새로운 경신례는 “영과 진리 안에 있는” 경신례로서 그리스도교 전례는 과거에 인류 구원을 위하여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한다. 즉, 그리스도교 전례의 기초와 윈천은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 행위이다. 이 구원 행위의 중심은 빠스카의 신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다. 이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이 구약의 백성에게 행하신 위대한 업적은 인류를 구원하고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 업적의 서막이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업을 특히 빠스카의 신비 곧 당신의 복된 수난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으로써 완성하셨는데, 즉 ‘친히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이기시고,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 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상에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 가슴에서 온 성교회의 오묘한 신비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5항). 그리스도교 전례는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기억, 기념하며 거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신비는 전례의 내용이며, 전례 거행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이 구원의 중심 사건은 바로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오늘의 사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설정 정신에 충실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특징이다.
예수께서는 참된 경신례가 생활과 밀접히 연결돼야 함을 강조하신다. 그분은 “제단에 예물을 드려야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구약 성서를 인용하시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태 12,7)라는 말씀을 통해 이웃 사랑을 외면하는 거짓 경신례를 비판하신다. 예수께서는 위선자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마태 23,23-24). 결국 경신례와 일상 생활이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즉, 전례와 일상 생활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뜻이다. 전례가 사랑의 실천과 하나 될 때, 전례는 그만큼 진실한 전례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교 전례를 설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 전례의 기초, 전례의 내용, 전례의 주제를 정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세세한 것까지 정해 놓으시지는 않았다. 그분은 그리스도교라는 밭에 전례라는 ‘씨앗’을 뿌리신 것이다. 그분이 뿌리신 씨는 이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싹을 틔우고 성장하게 된다.
[경향잡지, 1989년 1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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