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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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2 | 조회수2,560 | 추천수0 | |
[전례 해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천주교 신자는 불친절하다.’ 흔히 듣는 비판의 소리다. 어떤 개인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지적이다. 특히 성당에 처음 와본 사람의 경험담이다. ‘불친절하다.’는 말은 정답지 못하다, 쌀쌀하다, 반가움의 표시나 안내 또는 인사와 나눔이 없다는 뜻이다.
성당을 처음 찾아온 나그네는 입구에서부터 외롭다. 어디로 갈지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고도 인사는 고사하고 도와줄 뜻을 비치는 신자가 없다. 의자를 찾아 앉으면 옆 사람들이 쳐다도 안 본다. 반성해 보라. 독서할 때 빈손으로 와 앉아 있는 옆 사람에게 “매일 미사” 책을 함께 보자고 도와준 일이 있는가? 물론 독서는 잘 들으면 된다. 그러나 잘 훈련된 독서자도 드물지만 문제는 사람이 외롭다고 느낄 적엔 남의 말이 귀에 들리질 않는다.
요즘 이런 결함을 보완하고 있는 본당들이 많이 있다. 성당 입구에서 사목 위원들 또는 봉사자들이 웃으며 인사하고 주보를 나누어 주며 자리로 인도하고 “매일 미사” 책을 분배하거나 함께 보자고 친절을 베푼다. 본받을만한 본당 공동체이다.
인사말과 응답
미사가 시작되면 사제는 제단에 나아가 경의를 표하고 입당 노래가 끝난 후 십자 성호를 긋고 모인 교우들을 향하여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말을 한다. 즉 사제는 이 집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인사로써 표시한다. 주님이 함께 계셔야 진정한 안녕과 평화와 축복이 오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제의 인사말에 대답도 않는 벙어리 신자가 거의 반수나 된다.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를 받고 못들은 체 묵묵부답하는 사람도 있는가. 입당 전에 아는 교우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면 사제에게도 반가움과 존경과 환영의 인사말이 이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그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께 속해 있으니 축복을 받으시오.”라고 사제가 인사했다면 “또한 사제께도 주님이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하는 응답이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인사에 대답을 않는 것은 무례요 모욕이다.
세 가지 인사 방법
(1)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시는 성신께서 여러분과 함께.
(2) 우리 아버지이신 천주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3)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사제가 이상 세 형식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인사하면 교우들은 동일한 말로 “또한 사제와 함께” 하고 응답한다. (1)의 양식은 바오로 사도가 쓴 편지(2고린 13,13)의 끝부분인 인사말이다. 이 인사는 우선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 일체를 강조하고 이어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로 맺어지는 은총과 사랑과 친교를 바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로 미사의 지향이며 목표이기도 하다. 사랑은 끝이 없고 은총은 무한량하며 친교는 영원한 신비이다. 그렇다면 교우들은 이기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만 바라지 말고 이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미치기를 기원하자는 뜻이다(마태 22,9-10 참조).
(2)의 양식도 역시 바오로 사도의 인사말이다. 이것은 유다인들, 초기 교우들의 인사이며 그들의 원의는 은총과 평화였다. 문을 잠그고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맨 먼저 하신 인사 말씀이 ‘평화’였다(요한 20,26). 주교가 미사를 집전할 때 첫인사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이다. 사도들에게 행한 예수님의 첫인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은총이란 하느님의 총애, 자애, 애정, 호의, 친절이고, 평화는 여기서 나오는 안녕과 건강과 평온과 질서이다. 왜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는가. 그것은 세속의 소음, 잡념, 죄악, 불안, 갈등, 불화, 긴장 등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님이 그때와 함께
(3)의 양식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로서 신구약 성서 전반에 나오는 인사말이고, 초세기로부터 교회 전례에 사용되었다. 룻기(2,4)에 보면 보아즈가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였다. “야훼께서 자네들과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라네.” 일꾼들이 웅답하였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오.” 야훼의 천사가 판관 기드온에게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알렸다.
복음서(루가 1,28)에도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렸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그에 대한 마리아의 동의로 구세주가 잉태된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2데살 3,16)라고 인사하였다. 이기적인 사람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가 너무 형식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주님이 그대와 함께”라고 생각해도 좋다. ‘너 없는 세상 없고, 네 몸 없는 이웃 없으며, 네가 빠진 공동체는 무의미하다.’ 자신의 이기주의가 극복된 후 ‘우리’ 또는 ‘공동체’를 기대할 일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이 구절은 둘이나 셋 이상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려고 모인 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현존하시며 함께 간구한다는 뜻이다. 나와 이웃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는 자리야말로 주님도 함께 계신 장소임에 틀림없다.
현존과 현주소
예수님은 한때 떠돌이 신세였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집에서[定住] 제자들을 교육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전역을 정처 없이 다니시며 교육하셨다. 그래서 머물 곳이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예수님의 탄생지는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이었고 성장한 곳은 나자렛이었다. 그러나 공생활과 복음 전파를 시작하면서 가파르나움을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러면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그분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예수님은 부활 후 열두 사도들에게 발현하시기 전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1고린 15,5), 바오로 사도(“팔삭동이 같은 나” : 1고린 15,8)와 막달레나에게 개인적으로 발현하셨다. 이 기록은 신자 개개인에게 큰 뜻을 준다. 즉 신자인 나에게도 오시고 발현하시며 함께 계실 수 있다.
어떤 엄마가 성당에서 예수님 현존(現存)을 가르치려고 어린이에게 성체 감실을 가리킨다. “저기에 예수님이 계신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이가 성장한 다음에 ‘저기 계신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미신자처럼 말할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성체 감실에도 계시지만 믿는 이의 마음에 계시고 특히 기도하는 신자 공동체 안에 현존하신다. 주님의 현주소는 성당 감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당신 자신이다.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하는 것이다.
또한 사제와 함께
사제는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인사하면서 동시에 양팔을 벌린다. 마치 포옹하려는 모습이다. 이런 동작은 어디서 왔고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고대 로마에서는 웅변술이 뛰어났다. 당시 웅변은 언변만이 아니고 손과 몸의 여러 동작으로 청중을 감동시켰다. 이런 몸 동작의 일부가 교회 전례에 도입된 것이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는 주님과의 결합과 일치를 뜻한다. 제단에 먼저 인사한 사제는 손을 뻗쳐 신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신자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도록 격려하며 손을 잡고 몸을 맞대어 포옹하는 인사이다.
이처럼 정답고 뜻깊은 인사를 받고 겨우 입속말로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중얼대듯 끝내고 말 것인가. 미사 주례자는 사제이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최후만찬을 재현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전해 준다. 성당 건축, 판공성사, 강론, 피정 지도, 방문 등 성무도 많지만 모욕과 분노를 참고, 유혹과 긴장을 물리치며 과로와 병과도 싸워야한다. 영육간 지친 사제를 주님께서 손잡아 일으켜 주셔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응답하라. “주께서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크게 외쳐라.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1디모 4,14-16)을 묵상하라.
[경향잡지, 1991년 6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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