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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가톨릭 기도춤, 전례무용: 숨과 몸으로 바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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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26 조회수2,799 추천수0

[경향 돋보기] 가톨릭 기도춤, 전례무용


‘숨’과 ‘몸’으로 바치는 기도

 

 

유희적 존재로서의 인간

 

졸업논문에 대한 기억이니 이미 22년 전의 일이다. ‘유희적 존재(遊戱的存在)로서의 인간’이란 제목의 논문을 쓰면서, 인간 고유의 특성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에서 살핀 적이 있다. 그때 춤에 관해 언급했던 업보일까. 한국 가톨릭 전례무용단의 두 번째 지도신부를 맡은 지 어느덧 4년이 되었다.

 

놀이는 모든 동물이 갖춘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놀이의 본능적 본성에만 머물지 않고 개발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발전시키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데 인간 고유의 위대함이 있다.

 

인간학 분야에서 인간의 놀이 특성에 주목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가장 고귀하게 발달 성장한 놀이군에 인류의 종교 경신례 행위를 포함시키고, 반면에 가장 나쁘게 변질된 놀이형태가 전쟁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춤의 기도

 

춤과 노래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고 인간 경신례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류는 기쁠 때나 감사할 때 또 경외할 때나 경배를 드릴 때 춤을 추었고, 춤은 자연스레 기도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모든 춤이 모두 그대로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 민족의 정서와 심성과 혼이 깃든 고유의 문화가 그들의 춤이 되고 그들 기도의 언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한국인은 한국어로 기도하고 프랑스인은 불어로 기도할 때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즘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신 신부님들에게 전례무용, 춤의 기도들이 호응을 많이 얻고 있다는 말씀을 자주 듣는다. 아직 일반화한 기도는 아니지만 희망적인 시도들이 가톨릭의 영적 환경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우리의 춤은 숨의 춤, 내면의 춤

 

춤에 대한, 특히 우리 춤에 대한 중요한 상식 하나를 나누어본다.

 

대부분 사람들이 춤은 외적인 것, 보이는 것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 춤은 내면의 동작에 더 아름답고 강한 힘이 배어있다. 한국춤은 숨의 춤이고 내면의 춤이고 적절한 절제의 춤이다.

 

한국춤을 기본 바탕으로 한 창작춤인 전례무용은 숨결로 바치는 기도인 게다.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생명을 갖게 된 인간이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영의 숨결을 따라 호흡하는 것이 전례무용이니, 전례무용은 호흡으로 바치는 기도요 내면의 호흡이 몸으로 표현되는 기도이다.

 

매주 월요일 서울대교구 역삼동성당의 전례무용 기도모임에 오시는 분들은, 왜 이 시간이 무용 연습시간이 아닌 몸으로 드리는 기도의 시간인지를 넉넉히 체험한다.

 

누구나 무용을 배울 수는 있지만, 누구나 무용이 기도가 되게 하고 더구나 전례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마음과 정신으로 숨쉬어야 하는지, 교회의 정신과 전례의 지침을 따르고, 시대의 정서와 연령층의 코드에 맞는 몸의 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학습과정이다.

 

다만 사회에서 무용을 했던 분들이 교회 안에서 춤을 추면 그것이 곧 전례무용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전례무용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몸으로 드리는 기도 가운데 자주 깊은 영적 감동과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된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도하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 대하는 이들에겐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전례무용을 비롯한 복음 문화운동은 너무 감성적인 것이어서 엄숙한 경건함을 자긍심으로 여기는 가톨릭 정서에는 별반 맞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차가운 이성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랑으로 오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 안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오해와 우려를 넘어서

 

전례무용이 전통적인 우리 춤사위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어린 시절 동네에서 본 무당춤이나 매스컴을 통해 보던 전통굿판 등의 기억을 갖고 계신 분들은 전통적인 주술이나 접신행위 같은 미신행위가 기도춤 안에 혹 무심히 포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톨릭 기도춤은 우리의 전통 소재를 바탕으로 할 뿐 가톨릭다운 기도의 춤을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시대가 바뀌어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화의 시대는 창의적인 마인드를 지닌 이들의 시대다. 실패가 두려워 새로운 시도를 멈춘 집단은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다. 더러 시행착오를 겪고 작은 오류들을 만나더라도 시대에 적절한 가톨릭의 복음환경을 만드는 큰 시대의 소명 안에 전례무용의 고유한 영역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즐거운 경건함으로 초대 - 전례무용

 

참으로 경건한 것은 지나치게 엄숙하거나 경직된 틀이 아니라, 주님께 마음을 열고 숨길 수 없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복음적 자세라 믿는다.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때 쑥스러우니 아무도 모르게라도 살짝 몸으로 표현해 보고 싶지 않은가. 이왕이면 가톨릭의 정서에 맞는 꿈틀거림만으로도 마음이 담긴 몸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전례무용은 21세기의 문화시대에 적합한 영성운동의 한 부분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 예술의 전당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전례무용단 5주년 기념공연은 교회문화의 가치와 존재이유를 일깨우는 행복한 체험이었다. 공연 후 평화신문에 설린 공연의 평가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들이었다.

 

‘불꽃처럼 살다 간 순교자 강완숙의 삶과 신앙을 고스란히 전해준 감동적 무대.’

‘무희와 관객이 온 마음으로 호흡하며 동참한 공연.’

‘관객들의 감동의 전율이 고스란히 전달된 공연.’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정진석 대주교의 치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 문화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대작.’

‘교회 공연문화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공연.’

‘교회 공연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더 많이 위로받고 사랑받고 행복해야 한다. 21세기의 사람들은 행복하려고 복음으로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전례무용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복음의 기쁨에 젖게 하는 새로운 교회문화의 한 갈래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박유진 바오로 - 인천교구 신천 성당 주임신부로, 한국 가톨릭 문화원 지도신부를 겸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6년 4월호, 박유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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