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강론] <사순 제1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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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연 | 작성일2010-02-19 | 조회수1,771 | 추천수0 | |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하느님 백성의 신앙고백>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2,4-10 4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여라. ′너희는 세이르에 살고 있는 에사우의 자손들, 곧 너희 친족의 영토를 지날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겠지만, 매우 조심하여 5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 마라. 내가 세이르 산을 에사우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에게는 그들의 땅을 한 치도 주지 않을 것이다. 6 너희는 그들에게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사 먹고, 물도 돈을 주고 사 마셔야 한다. 7 주 너희 하느님은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었고, 또 너희가 이 큰 광야를 지나가는 것을 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주 너희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었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8 우리는 엘랏과 에츠욘 게베르와 아라바 길을 버리고, 세이르에 사는 우리의 친족인 에사우의 자손들을 비켜 지나갔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모압 광야 길을 따라 지나갔다. 9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모압을 괴롭히지도 말고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도 마라. 내가 아르를 롯의 자손들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에게는 그 땅 어느 곳도 소유지로 주지 않을 것이다. ― 10 전에는 그곳에 엠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우람하고 수가 많았으며 아낙인들처럼 키가 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화답송
시편 91(90),1-2.10-11.12-13.14-15(◎ 15ㄴ 참조) ◎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노라.” ◎ ○ 너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고, 재앙도 네 천막에는 다가오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 ○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너는 사자와 독사 위를 거닐고, 힘센 사자와 용을 짓밟으리라. ◎ ○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
제2독서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 고백>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8-13 형제 여러분, 8 의로움은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마태 4,4ㄷ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마태 4,4ㄷ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신명 2,4-10) 해설 <선택된 백성이 주님께 아뢰는 신앙고백>
이 대목은 이스라엘 백성이 햇곡식을 바치며 주님께 아뢰는 신앙고백이다. 햇곡식(거두어들인 첫 소출)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벗어나게 하고 좋은 땅을 주셨다는 신앙곡백을 하였다. 5절에 나오는 ‘아람인’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인 야곱을 가리킨다. 이 아람인인 야곱이 떠돌이 신세를 감수해야 했던 것은 그가 유목민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직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으로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가 마치 ‘길 잃은 양’과 같았기 때문이다(참조. 시편 118; 176). 그리고 햇곡식을 바치는 이유는 장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향한 기대와 신뢰만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실제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참으로 좋은 땅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햇곡식만을 봉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두어들인 모든 것이 진실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온갖 좋은 것의 유일한 소유자가 하느님이심을 인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모든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감사드리는 행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햇곡식을 봉헌하면서 신앙고백을 함께 곁들이는 것은 신앙고백도 하나의 봉헌행위로서 주인을 주인으로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앙 또한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신앙 역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자 은총이다. 사람은 신앙을 선물로서 받아들일 때 만물과 자신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주인으로서 받들 수 있으며 사람들끼리는 서로 형제자매로서 사랑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신앙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자신의 존재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으며 하느님의 소유인 온갖 것을 다른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나누어 사용함으로써 모든 것의 주인인 그분께 모든 소유물을 되돌려드리게 되며 봉헌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답송(시편 91[90],1-2.10-11.12-13.14-15[◎ 15ㄴ 참조]) 해설 <주님, 환난 가운데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
이 시편은 주님께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네.” 하고 고백하러 온 신자를 사제가 격려하는 시편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주인으로서 그리고 인자하신 아버지로서 구원과 생명을 주시리라는 약속으로 끝난다(14절 이하). 첫째 독서에 이어서 부르는 이 시편은 햇곡식을 바치며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는 하느님의 응답이다.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고 햇곡식을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의 복이 그에게 내리고, 구원과 생명이 충만하게 베풀어진다. 이같이 구원을 애타게 찾는 경우를 루카 17,11-19에 나오는 사마리아인과 나병환자에게서 볼 수 있다.
제2독서(로마 10,8-13) 해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신앙 고백>
이 대목에서는 바오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비(로마 9-11)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에 빠지자 그 대신으로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신비에 대하여 거론한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신앙 안에서 얻게 되는 ‘올바른 관계’(의화)가 비단 자기가 전파하는 복음에 나올 뿐 아니라, 모세의 법률인 토라(모세오경: 율법)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사실 바오로에게 율법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사람끼리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는 도구로만 간주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맡은 구실은 따로 있다. 율법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해 낼 수 없음을 실증해 주고 우리 혼자로서는 죄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음을 알려 준다(참조. 로마 7,7 등). 동시에 우리 구원이 우리 바로 곁에 있고 우리 입에 있으며 우리 마음에 있다고 선언한다(참조. 신명 30,14).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공으로 주신 신앙을 받아 하느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며 고백하면 족하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올바른 관계를 발견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속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즉, 우리 능력이 미치지 않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고성소에서 다시 하늘에 올라가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시는 분으로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인은 율법만을 완벽하게 준수하여 자력으로 구원받겠다는 고집을 버리고 자비로운 주인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신뢰하고, 이방인은 선행과 공로만을 많이 쌓아서 그 대가로 구원을 얻겠다는 고집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신뢰할 때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과 분열이 없어지고 하느님만이 모든 사람의 주인으로서 군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형제자매의 우애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실 것이다.
복음(루카 4,1-13) 해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복음은 나머지 두 독서에 나오는 신앙이라는 핵심 개념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 이 복음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전개한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학적 일화에서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루카 복음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들(루카 3,22)이신 새로운 아담(참조. 루카 3,23-38)’을 제시한다. 옛 아담(사람)은 악마의 유혹에 빠졌지만 새로운 아담(사람)인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모든 고통을 감수해 내며 온갖 유혹도 받았지만 모두 이겨 내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당신 직분을 수행하실 때만 유혹을 받으신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예수께서는 죽기 직전까지 “네가 유다인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라는 유혹을 받으셔야 했다(13절).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을 멀리할 때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을 채우는 이용가치로만 여기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 것처럼, 인간 예수께서도 당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지상의 어떤 왕보다 더 강력한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여 모든 사람을 굴복시키라는 유혹을 줄곧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가장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고 그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 즉, 예수께서 온갖 유혹을 이겨 내실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신앙 덕이었다. 신앙은 단순히 교리적인 진리만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처지에서도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신뢰하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 예수께서 그 같은 신앙을 완벽하게 실천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해 주셨다.
묵상 <신앙은 인류 역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행적을 읽어 내는 능력이다>
믿는 사람들은 역사와 현실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구체적인 현실과 사건들 속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하신다. 그분은 결코 당신 자신을 형이상학적인 사변이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계시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더욱 긴밀하게 체험하려면, 모든 민족의 역사와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 하느님을 섬기던 선조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생애 속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선조들과 당신 아들에게만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구도자로서 고뇌하며 살고 간 모든 성현에게도 당신을 계시하셨으며 선택된 것처럼 보이는 뛰어난 인물만이 아니고 이름 없이 살고 간 수많은 사람 개개인에게 당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세상 마칠 때까지 인간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당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만들어 내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지역, 종족, 문화, 종교 속에서 일하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정성스레 그분을 모실 줄도 알아야 한다.
<유혹을 이겨 내신 인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닮아야 할 가장 모범적이고 완벽한 사람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 온 생애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순간까지 시련과 유혹을 당하고 이겨 냄으로써 부활이라는 승리를 얻으셨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의 당연하고 의연한 자세는 바로 사람에게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려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내맡기는 자세이다. 그런 자세를 굳게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만을 자기 주인으로 여기며 다른 어떤 사람도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 사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다스릴 아무런 자격도 없으며 또한 자신을 위해 이용할 권리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연대감을 가지고 돕고 살며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자세를 늘 견지하는 길이다. 예수께서도 갖가지 유혹에서 당신 자신을 구출해내셨고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낌없이 당신을 십자가상의 죽음에 내맡기셨다. 물론 그 쓰디쓴 잔을 물리쳐 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 목숨을 내맡기셨다. 우리는 모두 가장 완전한 사람의 생애를 살아온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시련을 이겨 내면서 역사와 현실 속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활동을 체험하며 그분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음해설(2)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4,1-13)’ 이 대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ㄱ) 이야기 식의 서언(1-2절). ㄴ) 사탄이 던지는 세 덫과 예수께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내놓으시는 세 답변(3-12절). ㄷ) 이야기 식의 결어(13절). 앞 대목들에서, 루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즉 인간 존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게끔 인도하는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사명을 띠고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예수께서 온전한 인간이심을 분명히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따른 유혹에 맞설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마르 1,12-13은 가장 짧은 유혹 이야기다. 마태오와 루카는 후대의 사건들로부터 취한 자세한 기준들을 덧붙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네 신학 관점에 따라서 그 전승을 넓힐 수가 있었다. 루카에 따르면, 예수께서 겪으신 첫 번째 유혹은 요한 26,34를, 두 번째 유혹은 요한 6,15를, 세 번째 유혹은 요한 7,1-4를 생각하게 한다. 또 다른 비슷한 점들은 마태 12,38-42; 16,14; 27,42에 나온다. 아마 루카는 예수께서 당신 일생 동안 겪으신 유혹을 한 데 모으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완수하신 사명의 의미에 관하여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한 장면에 그 유혹을 담아내려 시도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깊은 내용은 묵시문학적인 내용이다. 즉 광야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나타나고(참조. 사도 21,38), 예수께서 메시아로 나타나시는 일에 천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메시아가 ‘이 세상의 우두머리’와 직접 대결하고, 시대를 단계별로 나눈다(루카 4,13). 이 자세한 사항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건의 역사성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게 한다. 분명히, 구약과 신약 사이의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통용되던 관념들에 비추어 구약성경의 요소들(이집트 탈출 등)로 만들어진 문학유형, 그리고 사회정치적・종교적 유형의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들로 만들어진 문학유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구나, 초기 그리스도교가 특정한 메시아적 흐름들과 빚은 대결은 나자렛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에 비추어 밝혀야 할 생활기준과 활동기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이때 미드라쉬(율법과 주님 앞에서 취할 태도에 관한) 이야기들 또는 ‘페세르’(성경의 말씀이 채워졌음을 입증하는) 이야기들과 문학적으로 근접한 그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예수께서 메시아시라는 사실에 관한 성찰로부터 출발하여 독자의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있었다. 메시아로서 당신 삶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축성’과 ‘공식 임명’으로서 세례를 받으신다. 이제 당신이 받으신 유혹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이신지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즉 당신은 정치적인 메시아나 국수주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수난하는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해석의 열쇠는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을 모세라는 인물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배경 위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예수께서는 이집트 탈출 체험을 당신 생애에서 다시 재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광야는 적극적인 성격과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마귀들과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황량한 곳으로 나온다(레위 16,22; 토빗 8,3; 즈카 5,11). 예수께서는 그런 광야에서 적대 세력들에게 둘러싸여 계시면서도 맹수들과 더불어 완전히 조화롭게 살아가시는 분으로 제시되고 있다(이사 11,6-9; 창세 3,19-20). 그러나 또 어떤 때는 광야가, 예언 전승에 따라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갓 벗어난 다음 광야에서 하느님을 충실하게 따르던 젊은 시절처럼, 다시금 사랑을 나누시는 장소로 나와 있다(참조. 호세 2). 예언서 본문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유다인은 광야에서처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의 이야기는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 단계가 다가왔다고 말하는 시적인 문학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가 복음서와 마태 4,1-11을 비교해보면,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자료 ‘Q’(마르코 복음서가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가 알고 있던 기록물)에 의하여 전달된 원래 형태와 더 가까운지 단언하기가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대목들에서, 마태오 복음서는 더 독특한 형태를 담고 있다(루카 12와 마태 6을 비교하라). 마태오는 특히 새로운 모세라는 주제를 돋보이게 한다(루카와 아주 다르지는 않다.). 즉 예수께서도, 모세와 마찬가지로, ‘가장 높은 산’ 위에서 나타나신다(마태 4,8; 참조. 34,1-4). 그 외에도, 예수께서 ‘사십일 밤낮’ 단식을 하셨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단식과 모세의 단식을 긴밀하게 결부시킨다(참조. 신명 9,9.18; 탈출 34,28). 흥미로운 점은 마르코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에크발레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목격증인이 본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마태오는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아넥테’)고 말함으로써 사건 전체를 성령께서 이끄셨다는 관념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루카는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가셨다.”(‘에게토’)라는 불완전 동사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지속적인 활동을 가리키려 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 대하여 겪는 체험이다. 루카 복음서에서 순서가 그렇게 바뀐 것은 상징성으로 가득 찬 절정을 제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루카 신학 전체에서 항상 그렇다. 이때 원래 형태는 마태오 복음서에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더불어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친교를 나누신 다음에야 비로소 악마의 나라와 대결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세력이 악마의 세력, 악마에게 예속된 세상의 세력과 맞선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1-2절: “성령으로 가득 차셨다.”는 말은 루카의 특징적인 표현이다(참조. 사도 6,5; 7,55; 1,24). 성령께 대한 그와 같은 관심은 루카 복음서 첫 장들에서 뿐 아니라(1,15.35.41.67.80; 2,25.26.27), 루카 복음서 나머지에서도 나타나 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와 달리, 여러 기회에 성령께 대한 언급을 덧붙인다(참조. 4,11.14.18; 10,21; 11,13). 그런 집요함 때문에 루카 복음서를 ‘성령의 복음서’라고 부를 수 있다(참조. 사도행전도 ‘성령의 복음서’라고 부른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는 말은 마르 1,12에 나오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는 말보다 덜 강하다. 마귀 또는 악마(‘디아볼로스’)가 예수님을 꼬드긴다. ‘악마’라는 이름은 ‘고발하는 자’, ‘모함하는 자’, ‘유혹하는 자’를 뜻한다. 마르코는 마태오 복음서의 ‘악마’와 같은 뜻을 가진 ‘사탄’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유다 랍비 문학에 따르면, 악마 또는 사탄이 띤 임무는 세 가지다. 죄를 짓도록 유인하고(참조. 즈카 3,1; 욥 2,6-7), 하느님의 법정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고발하고, 죄에 대한 벌로서 죽음을 가져다주는 일이 그 세 가지다. 그래서 악마의 이름을 ‘죽음의 천사’라고 한다. 욥기에서는 ‘적’(히브리어로, ‘사탄’)이라고 부르고, 요한묵시록에서는 “우리 주 하느님 앞에서 밤낮 우리를 고발하는 자”라고 부른다. 3-12절: 첫 번째 유혹(3-4절)은 예수께서 어떤 메시아가 되려 하시는지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 메시아를 자처한 많은 사람들이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원했다. 또 다른 유혹은, 로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백성에게 ‘먹을 것과 즐길 것’을 줌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라는 것이었다. 이 유혹에 예수께서 내 놓은 답변은 장차 당신이 취할 태도와 펼칠 활동을 미리 보여준다. 마태오는 ‘이 돌들에게’라고 복수로 말하지만, 루카는 ‘이 돌더러’라고 단수로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수로 나오는 ‘이 돌더러’라는 표현이 개인으로 받은 유혹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리고 마태오는, 유혹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예수께서 대표하신다고 해서, 집단이 받은 유혹을 나타낸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하느님-메시아로서 기적을 행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기적에 관한 법칙 가운데 하나는 쓸데없이 기적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신명기에 나오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신명 8,3; 참조. 탈출 16)라는 말씀으로 답변하신다. 신명기는 사도 교회가 좋아하던 책 가운데 하나다. 신명 8,3 전문은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이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주신 답변의 의미를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3; 참조. 요한 4,32)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유혹(5-8절)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준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말이 예수께서 실제로 높은 곳으로 끌려가셨음을 가리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지배권과 관련한 일종의 환시를 가리킬 것이다. 루카가 말하는 세상은 악마의 지배권 아래 있다(요한 12,31; 14,30; 16,11; 루카 22,53; 사도 26,19). 그 세상은 예수님과 우주적 차원의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인다(묵시 13,1-8). 악마는 죄와 그 결과를 이 세상 안에 들여놓았다(지혜 2,24; 로마 5,12; 마태 8,29; 갈라 4,3; 콜로 2,8). 그리고 이 세상 위에 군림하기에 이르렀다(요한 12,31). 그러나 악마의 지배권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의하여 숨이 막힌다(참조. 마태 20,28; 로마 3,24; 6,15; 콜로 1,13.14; 2,15; 에페 2,1.6; 6,12; 요한 3,35; 1요한 2,14; 묵시 13,1-18; 19,19.21). 하느님께 바치지 않는 모든 흠숭행위와 온갖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을 물리치려고 예수께서는 다시금 신명 6,13; 10,20(참조. 탈출 23,24)을 인용하신다. 세 번째 유혹(9-12절)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두 번째 유혹과 맞아떨어진다. 아마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유혹 순서가 이야기의 원래 순서였을 것이다. 유혹하는 악마는 하느님께서 정의로운 사람을 돌보고, 더 강한 이유로, 당신 메시아를 돌보신다는 시편 91,11-12를 인용하면서 자기 제안의 근거를 들이댄다. 악마는 아마도 예수께서 랍비 문학이 메시아가 출현하리라고 기다리던 성전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려보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신명 6,16을 다시금 끌어다대면서 그 유혹을 물리치신다. 그렇게 하여 놀라운 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메시아관을 물리치신다. 예수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보잘것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길을 거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당신 기적은 눈부신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인간적 고통으로 벗어나게 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13절: 루카는 마태오와 다르게 결론을 내린다. 이야기를 시간대로 나눈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 물러갔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수난을 미리 암시한다(22,3.53). 이 점에서는 요한과 가깝다(참조. 요한 6,15; 12,31; 13,2.27). 그래서 루카는 마태 16,23에 나오는 일화까지 뺌으로써 예수님의 공적 직무와 관련한 그 어떤 유혹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악마는 마지막에 가서, 수난 이야기에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다. 루카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은 기도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십자가의 길은 승리를 거둘 것임을 보여준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탈출 19-34, 그와 병행하는 신명기 본문들, 신구약중간 시대의 묵시문학, 당시의 메시아사상들의 기초 위에다 이 본문을 놓음으로써, 루카는 독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려 한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모세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역할을 해 내신다. 그래서 모범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기능이 초기 교회의 상찰에 언제나 드러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을 몸소 받음으로써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유혹을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유혹에 떨어지는 것이 나쁘다. 이미 바오로가 히브리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우리에게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5)라고 설명했다. 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유혹은 흔히 손쉬운 사회정치적 메시아사상에서 비롯된다. 예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음을” 몸소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원칙을 당신 삶의 지침으로 삼으신다.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의 변화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냄으로써가 아니라 겸손하게 형제자매인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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