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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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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23 조회수3,060 추천수0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2(21),8-9.17-18ㄱ.19-20.23-24(◎ 2ㄱ)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 저를 보는 자마다 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 대나이다.

“주님께 맡겼으니 그분께서 그자를 구하시겠지.

주님 마음에 드니 그분께서 구해 내시겠지.” ◎

○ 개들이 저를 에워싸고, 악당의 무리가 저를 둘러싸,

제 손과 발을 묶었나이다.

제 뼈는 낱낱이 셀 수 있게 되었나이다. ◎

○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나이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마소서.

저의 힘이신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

○ 나는 주님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야곱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 드려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필리 2,8 - 9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도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수난 복음>

[해모&&&& 여기서부터 작은 글씨로]

촛불도, 향도, 인사도, 책에 하던 십자표도 없이 읽는다. 부제가 읽든지 부제가 없으면 사제가 읽는다. 평신도도 읽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되도록 사제가 읽는 것이 좋다. 부제가 읽을 때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축복을 청한다. [해모&&&& 여기까지 작은 글씨로]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22,14 ─ 23,56 또는 23,1-49


[해모&&&& 작은 글씨로]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 해설자  +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 17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 19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20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23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24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27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28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30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32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 33 베드로가 말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 3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물으셨다.

+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3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 38 사도들이 말하였다.

●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것이면 넉넉하다.”

○ 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40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 41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 42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 43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44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45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4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 47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4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 49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말하였다.

●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51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만해 두어라.”

○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52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 54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 57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 58 얼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말하였다.

●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 베드로가 말하였다.

●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 59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주장하였다.

●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 60 베드로는 말하였다.

●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63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며 조롱하였다. 64 또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물었다.

●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 65 사람들은 이 밖에도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퍼부었다. 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말하였다.

● 67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하시오.”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고, 68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69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

○ 70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모두 물었다.

● “그렇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

○ 71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였다.

●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합니까?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들었으니 말입니다.”>

○ 23,1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 3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 4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 5 수석 사제들과 군중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 6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14 그들에게 말하였다.

●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7)

○ 18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 19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그들은 외쳤다.

◎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22 빌라도가 세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말하였다.

●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 그러자 23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 32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빈정거렸다.

●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그분을 모독하였다.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 40 다른 죄수가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 42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4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44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 47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 48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53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 54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56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해모&&&& 작은 글씨로]21.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에 강론을 짧게 한다.

<신경>[해모&&&& 작은 글씨로] 

 

영성체송


마태 26,42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해설과 묵상


제1독서(이사 50,4-7) 해설

<수난하시는 종은 박해자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당신을 내맡기신다>


종에 관한 세 번째 노래인 이 대목은 다른 두 노래와 차이점이 있다. 이 대목에 나오는 인물은 분명히 ‘종’이지만(참조. 10절), 그 종이 보편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대목은 제2이사야의 ‘종’에 관한 ‘고백’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이 대목도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예고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첫 언명(言明)은 ‘제자’로서 예언자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달자로서 전언(傳言: 메시지)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이 그의 귀를 열어 주고, 그에게 당신 말씀을 내려, 자기 자신의 말을 아무것도 덧붙임이 없이,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예언자의 특징이고, 예수께서도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분명히 하셨다.

종에 관한 둘째 노래에서 어렴풋하게 암시된 다른 측면 하나가 셋째 노래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가 폭행을 당한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단순히 예언자가 당하는 몰이해와 박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수난이 예언자의 사명에 속하고, 실상 그 자신이 이 박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올바름이 가려질 것을 알면서 “차돌처럼 얼굴빛은 변하지 않는다.”

이 수난의 의미는 종에 관한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에 가서야 충분하게 설명할 것이다.

종이 받은 소명의 이 같은 측면도 예수께서는 당신 것으로 취하고, 당신 수난에서 재현하셨다(참조. 마르 8,31; 9,31; 10,33 이하).


화답송(시편 22[21],8-9.17-18ㄱ.19-20.23-24[◎ 2ㄱ]) 해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서 이 시편도 ‘종’이 받을 수난에 대한 예언이 되고, 그 인물 안에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수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당신 안에 수렴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백성의 운명은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의 길을 통과해야 하는 운명이다.


제2독서(필리 2,6-11) 해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그러므로 하느님이 그분을 들어 높이셨다>


그리스도교가 옛날부터 불러온 이 찬미가는(아마 바오로가 몸소 쓴 것이리라.) 그리스도께서 이사 52-53에 나오는 수난하는 종과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행구들을 찾아보자. ‘자기 자신을 버렸다.’(7절: 이사 52,12), ‘종의 신분’(7절: 이사 52,13),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다.’(7절: 이사 52,14), ‘죽기까지 순종하시다.’(8절: 이사 53,12), ‘하느님이 그를 들어 높이셨다.’(9절: 이사 52,13)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돋보인다.

- 여기서는 단순히 하느님이 ‘종’이 되라고 소명을 내리신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지니고 계신 분’, 최종적으로 ‘주님’이라 불리시는 분, 모든 히브리인들이 ‘하느님’께 붙여 드리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가지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종’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사 53,10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하느님 홀로 ‘종’의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 없는 분만이 제물이 될 수 있는 속죄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만이 죄가 없고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2코린 5,21; 요한 8,46).

마지막으로 10-11절에서 이사 45,23이 인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즉, 주님)라는 대명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주님’으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금 예수께서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심으로써 ‘주 하느님’과 동일시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섬기러 오신 ‘주님’이시다(참조. 마르 10,45).


복음(루카 23,1-49) 해설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 이야기>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로마 총독에게 당신을 큰 반란범(“백성들에게 소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으로 고발한다. 예수님의 활동 전체를 걸어 세 가지로 고발한다. 경제면에서(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정치면에서(왕으로 자칭하고), 이념면에서(혁명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고발을 한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예수께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

당국자들이 예수를 고발하는 실제 이유가 하나같이 유다인 특권층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유다인 특권층이 정치와 경제면에서 백성을 억누르고 빼앗아 누리고 있던 특권을 당신 말씀과 활동으로 뒤흔들어 놓고 계셨다. 그들은 그 모든 불의한 짓을 종교의 탈을 씌워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그 점을 직접 공격하고 계셨다. 그들이 경제와 정치에서 저지르는 불의한 짓을 숨기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고발하셨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와 유다와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던 것이다.

빌라도가 헤로데의 관할권을 존중하기로 함에 따라 빌라도와 헤로데 사이의 불화가 없어진다. 헤로데 앞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겠기에 침묵을 지키신다.

빌라도와 헤로데가 서로 미워하게 된 것은 빌라도가 갈릴래아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손을 잡는다. 권력자들이란 서로 이익이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적이었다가도 언제라도 서로 합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 자체가 위태로울 때는 모든 권력자들은 기초부터 흔들리면서 서로 협력하게 되어 있다.

헤로데나 빌라도나 예수님의 계획이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칠 효과의 범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23,4.14.15.22). 예수님의 종교적인 가르침은 유다 당국자들에게나 위험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다 당국자들은 예수께서 유명한 반란범인 바라빠보다도 훨씬 위험인물임을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에게 ‘반란범’, ‘반역자’, ‘소요를 일으킨 폭도’로 고발당하신다. 군중은 유다 당국자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를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주라고 청한다. 유다 당국자들은 예수께서 사회를 정치․경제․종교 등 모든 면에서 변혁을 일으키려 하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불의한 유다 당국자들은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과 당신 계획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중에게 함성을 지르게 한다. 빌라도는 마침내 군중의 함성에 지고 만다. 예수를 반란범으로 사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를 상징한다(참조. 루카 9,23). 예수께서는 끝까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몸 바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만을 아파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계획에 등을 돌린 데 따른 결과 앞에서 울어야 한다. 무죄하게 희생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십자가형은 반란범에게만 내려지던 형벌이다. 이 두 사람도 예수님처럼 변혁을 열망했겠지만 예수님만큼 근본적인 변혁을 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수들 가운데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백성과 그들의 우두머리들과 병사들이 놀리는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을 죽인 책임자들은 용서를 받는다. 자기네 행위의 심각성과 결과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죄명을 써 놓은 명패는 사람들을 자유스럽게 하고 살리는 왕권이 왔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다.

백성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하느님의 계획을 비웃는다. 모든 사람을 구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비웃는다. 군인들도 지지 않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들은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을 비웃는다.

예수께서는 왕이시지만 여느 왕과는 아주 다르다. 자기 지배권력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 당신 생명을 바치는 왕이시다. 하느님의 나라와 통치는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예수님과 죄 없는 많은 사람의 피를 대가로 요구할 것이다.

모든 것이 망했다 싶은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구원자로 보여주신다. 예수께서는 살아 계시는 동안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홀로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의한 사회가 단죄한 사람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예수와 당신 계획은 죄수들까지도 갈라놓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를 비웃는다. 예수 방식의 변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반란범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계획을 받아들인다. 정의와 자유와 생명은 지배하는 세력이나 권력에 의하여 실현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복음서의 정점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손에 당신 자신을 넘겨 드리는 행위다. 예수님의 죽음은 재력과 권력에 바탕을 둔 체제의 폭력을 불러일으키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는 사람들을 편드신 당신 생애와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그 죽음은 또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당신께 순종한 결과다. 그밖에도 예수님의 죽음은 진실을 나타낸다. 백성은 뉘우치고 이방인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심을 선포한다. 자기가 속해 있는 체제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죽이는 사악한 체제임을 인정한다. 군중도 가슴을 치면서 뉘우친다. 예수님의 친지들과 여인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서 사태를 낱낱이 지켜본다. 이들이 앞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복음해설(2)


새로운 파스카(22,14-20)

최후 만찬 이야기는 세 공관복음서에서 수난 이야기를 시작할 때(참조. 마르 14,22-25; 마태 26,26-29)에 나온다. 그리고 1코린 11,24-25에도 나온다. 이 네 이야기는 독립된 자료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마태오 복음서 수난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 수난이야기와, 몇몇 가벼운 손질 빼고는, 대부분 합치한다. 그에 비해서 루카 2,14-20에 나오는 수난이야기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일련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점은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를 제기한다. 성찬의 빵과 잔에 대하여 말하는 19-20절, 마르코 복음서 및 마태오 복음서와 병행하는 구절들과 다소간에 상응하는 19-20절 앞에다 루카는 파스카의 어린양에 대하여 말하는 15-18절을 배치한다. 15-18절에서 예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 루카가 자기만 가지고 있는 원래 전승의 증인이었다는 사실에 그런 변화의 원인이 있다고 여긴다. 그 전승은 성찬례에 대한 또 다른 초기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아마 예수께서 거행하신 파스카 만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회상한 내용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들이 루카가 편집 작업을 한 결과라고 본다. 루카가 마르코의 전승을 1코린의 전승과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예술적으로 균형이 잡힌 두 쪽으로 된 내용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유다교 파스카와 그리스도교 파스카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옛날 예절에서 사용하던 어린양과 잔(15-18절)을 성찬례의 빵과 잔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19-20절).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성찬례 양식(樣式)(19-20절)은 1코린 11,23-25에 나오는 양식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루카가 아마 본문 전승보다도 바오로 교회들의 전례 실천 내용을 수집한 것 같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해석과 합치하여 우리는 15-20절 묶음이 면밀하게 작성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루카는 바오로의 전승, 마르코의 전승, 자기의 독특한 재능을 솜씨 있게 배합했을 것이다.

더욱이 루카 복음서 이 대목은 본문비평이라는 유명한 문제를 제기한다. 옛날 여러 증언들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라는 19절 일부와 20절 전체를 뺀다. 그렇지만 수사본 전승에서는 완전한 본문이 입증되어 있다. 그리고 빠졌다는 부분은 의심할 여지없이 17절에서 언급한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잔의 ‘들어가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감사를 드리신 두 잔이 있다는 사실이 어떤 복사자(複寫者)들을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그래서 첫째 잔을 성찬례의 잔으로 여기고서 둘째 잔을 뺐을 것이다. 

본문을 더 넓게 살펴보면 대칭적 구조를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루카는  병행하는 이중 표현을 - 15-18절과 19-20절을 - 만들어낸다. 그 표현을 각각 서로 상응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작성했을 것이다. 즉 ‘파스카 만찬’(15절)/‘빵을 뗌’(19절) 그리고 ‘첫째 잔’(17절)/‘성찬례 잔’ 식으로 작성했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는 공관복음서 가운데서 명시적으로 최후 만찬을 파스카 만찬으로 제시한 유일한 복음서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그리스어로는 ‘프로투 메 파테인’, 15절). 루카의 기록물 가운데서 ‘겪다.’로 번역한 동사는 일반적인 고통을 가리킬 수 있다(17,25). 그러나 흔히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의미를 띤다(24,26.46; 사도 1,3; 3,18; 17,3). 그런 의미는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히브 2,18; 5,7-9; 13,12; 1베드 2,21). 그때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뜻하게 되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그 파스카가 당신에게는 마지막 파스카가 되리라고 예고하신다.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16절) 이미 가까이 들이닥친 당신 죽음을 예고하신 것이다. 이 예고는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당신 손에 파스카의 잔을 든다고 말씀하시는 18절에서도 되풀이된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18절)  마르코는 예수님의 이 예고를 성찬례 제정 다음에다 배치한다. 그러나 루카는 그 예고를 성찬례 제정 앞에다 배치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배치는 루카 복음서 저자의 편집에다 돌려야 할 것이다. 사실 루카 복음서의 수난이야기의 문학 구조 전체가 신학 관념, 즉 성찬례가 그리스도교의 파스카라는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관념을 특히 ‘P. 삐에르 브놔’가 강조했다. 14-20절에 대한 그의 해석에 따르자면, 루카는 먼저 옛 파스카를 언급하고 도식적인 형태로 묘사하면서 성찬례 파스카의 동작들에 상응하는 그 두 동작을 두드러지게 했다는 것이다. 즉 파스카의 어린양과 포도주 잔을 성찬례와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양과 포도주 잔을 제시한 것은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루카는 그 두 예절을 병렬시킴과 동시에 대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다교 파스카는 효력을 잃고, 성찬례가 옛날 예절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대로 배치함으로써 루카는 마르 14,25에 나오는 종말론적 선언에 새로운 가치를 싣는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그 결정적인 성취는 ‘미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즉 고별할 순간, 당신이 떠난다는 사실에 대한 선명한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 하느님 나라를 향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땅 위에서 당신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당신 말씀과 활동으로 그 나라가 이미 와 있는 실재(實在)임을 엿보게 하셨다. 그때부터 예수님 말투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식으로 단호해진다. 예수께서는 미래 하느님 나라가 새로운 나라임을 강조하신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마태오는 ‘너희와 함께’라는 말을 덧붙인다(26,29).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죽음을 재현하기 위하여 주님의 만찬을 거행한다. 그리고 장차 오실 그분께로 시선을 향한다(참조. 1코린 11,26).

루카의 생각은 더 복잡하다. ‘브놔’에 따르자면 예수께서는 땅 위에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않으리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옛적 파스카 예절에 마침표를 찍으신다. 옛날 파스카는 앞으로 올(‘엘테’, 18ㄴ절)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온전히 완성(‘플레로테’)되어야 한다. 그러나 루카가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현존과 설교를 통하여 땅 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11,20; 참조. 10,9; 16,16; 17,20).

마르코 복음서의 순전히 종말론적인 의미가 새로운 파스카 예절을 거행하는 분위기를 향하여, 다시 말해서, 교회를 향하여 자리 이동을 함으로써 풍부해진다. 그때 교회론적 관점이 종말론적 관점보다 더 강조된다. ‘플레로테’라는 동사(이루어질 때까지)가 꼭 마지막 결정적인 성취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옛 계약의 예언과 증표는 이미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그리고 초기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4,21; 24,44; 사도 1,16; 3,18; 13,27). 그렇게 하여 유다교 파스카는 새로운 피스카인 성찬례에서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루카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부활 다음에 먹을 식사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 21,9-13과 똑같은 내용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24,30.41-42; 사도 10,41). 

성찬례 제정에 대한 네 증언은 빵을 쪼개는 동작을 강조한다(마르 14,22 마태 26,26; 루카 22,19; 1코린 11,24). 이 점에서 바오로와 루카는 실제로 전적으로 합치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마르코 및 마태오와도 합치한다(이들은 ‘에우카리스테사스’<감사를 드리다.>라고 하는 대신 ‘에울로게사스’<찬미를 드리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께서 취하신 동작은, 유다인 식사를 주제하는 사람이 흔히 취하는 동작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동작에 붙인 그분의 말씀, 즉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특별한 의미를 띤다. 그 말씀을 발음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빵에다 새로운 가치를 주신다. 그 빵은 이미 빵이라고 부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당신 동작과 말씀에 의하여 변형된 실재(實在)다. 이제 예수께서 떼어 나누어주시는 빵은 당신 몸이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새로운 존재 형태로서 그곳에 현존하여 계신다고 말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현존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당신을 만나 당신과 일치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성찬례의 빵을 받아먹으라는 초대요 부르심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동작은 단순히 함께 식사를 하면서 당신을 기념하는 동작이 아니다. 그 동작은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스승의 현존을 실현하는 동작이다. 예수님의 현존은 당신이 죽임을 당하신 다음에도 이어져야 한다. 그 전례적 동작을 되풀이해야 한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그 반복하는 순서를 뺀다. 그것은 아마 전례를 거행할 때 불가피하게 그 동작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 동작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성찬례에 대한 네 증인은, 문법 구조는 달라도, 잔을 축성하는 양식은 똑같은 요소들로 만들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공관 전승에서 ‘잔’은 이미 예수께 들이닥친 고통, 고뇌, 죽음을 가리키는 은유다(루카 22,2; 참조. 마태 22,23; 마르 10,38-39). 포도주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잔에 포도주가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포도주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실재다. ‘계약’에 대한 언급은 탈출 24,8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가리켜 보이려고 모세는 제단과 백성 위에 재물로 바친 동물 피를 뿌린다. 제자들은 그 ‘잔’을 마심으로써 예수께서 시작해 놓으신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과 맺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대로 예레미야의 예언(예레 31,31-34)이 이루어진다.

이 문맥에서 그 해에 유다교 파스카가 어느 날에 해당하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공관복음서들에 따르자면 파스카 축제는 목요일 오후(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린양들을 잡던 시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서 파스카 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파스카 만찬을 금요일 저녁에 지낸다. 그래서 금요일 새벽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요한 18,28), 다시 말해서 금요일이 파스카 만찬을 준비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요한 19,14).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날짜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께서는 파스카 전날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에는 파스카 날이 안식일이었다. 우리는 천문학적 탐구 덕택으로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즉 예수님에 대한 사형은 30년 4월 7일에 집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너무 길어서 등록되지 않아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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