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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로마 전례 개혁의 내적 원리: 본질상 개혁을 제시하는 로마 전례와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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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7 조회수1,918 추천수0

로마 전례 개혁의 내적 원리 - 본질상 '개혁'을 제시하는 로마 전례와 한국교회

 

 

서언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에서 교황 비오 5세는 200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개별 교회는 예외적으로 자신으 고유한 전례 전통을 따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며, 이에 따라 공의회 직후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으 큰 교구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전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로마 전례 전통에 대한 깊은 연구와 통찰을 통해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방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이들 지역으 200년 이하의 전통을 지닌 교구들도 공의회 직후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전례상의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전례 전통에 대한 성숙한 인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들만의 전례서를 따로 발간하는 등 나름대로의 전례를 꾸려 나갔다. 비록 이것이 공의회의 결정에 위배되는 모습이기는 하나 그 내면에 담고 있었던 많은 좋은 점들이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방향과 많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보아야 하며 옳고 분별력 있게 평가해 줄 일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 고유의 전례 전통을 꾸려 나갈 법도 하다. 아니,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전례적 상황이, 전례가 지니고 있는 성사적 본성으로부터 그러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로마 전례의 역사는 초세기부터 시작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르기까지 부단한 개혁(reformatio)을 이루어 왔으며, 로마 이외의 지역에 있는 개별 교회에 대하여도 이러한 개혁을 이미 그 본성상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개혁을 시도하고 또 유럽의 개별 교회들이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전례전통을 만들어 나가려는 여러 시도들을 하였던 것은 어떤 맹목적 진보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는 사도록부터 이어오는 오래된 전례 전통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신자들의 구원을 바라는 교회의 자부적인 사랑이 성숙한 학문적 토대위에서 로마 전례 전통의 본질적 통일성을 유지하며 이루어 낸 결과물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로마 교회는 왜 전례를 끊임없이 개혁해 왔는가? 그리고 그런 부단한 개혁이 왜 필요했는가? 로마 전례는 그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 왔고 그 원리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다루려면 먼저 '전례'가 무엇이기에 본성상 부단한 개혁을 요구하며 그 개혁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하는 전례 자체에 대한 의문부터 접해야 한다.

 

아주 협소한 의미로 전례의 범위를 제한해 보자면, "전례는 '그리스도교의 경신례(cultus christianus)'로서 교도권의 권위로 반포된 예식서(rituale)를 통해 예식(ritus)을 공적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신례(cultus)인 이상 하나으 반복되는 '형(forma)'이 필요하며 그 '반복을 통한 상승'의 체험과 그 형이 '최선'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전제된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교의 경신례가 왜 필요한가? 여기에 전례 신학적인 토대의 제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토대는 19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전례를 이성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시도에서 태동하게 되는 전례학, 특히 그 중에서도 전례 신학에서 탐구되었다. 이후 그 영향은 1900년도 초 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났던 '전례 운동'에까지 이어지고, 거기에 담겨 있던 전례 신학은 이 전례 운동을 철저히 비평하고 수용한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Mediator Dei(1947년)에 반영되어 마침내 '전례 공의회'라고 불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촉발하였다. 그리고 그 '전례헌장'에서 비로소 공적인 결실을 보게 되니, 결국 이것이 '전례 헌장' 전체가 제시하고 있는 전례 신학이다. 이제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내면의 원리를 통하여 알아보자.

 

 

1. 전례의 필요성과 의미 - 전례안에 신비로 현존하시는 예수님

 

전례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에 따른 인간 구원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이 사실은 인간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알려져서' 인간이 신앙을 통해 그것을 느끼고 깨달음으로써, 적어도 인간 편에서는, 비로소 은총의 힘으로 효력을 발휘하며 이 은총의 샘으로부터 길어 온 생명의 힘으로 이미 이 지상의 삶에서부터 영원한 구원을 미리 맛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시며 구원을 '알려 주셨다' 창조 직후에는 자연의 온갖 현상을 통하여, 낙원에서의 추방 이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때가 되어서는 당신께서 직접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목숨까지 바치며 알려 주셨다.

 

인간 구원을 위해 수난받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에서 인간에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극치에 달하며 완성된다.

 

그러나 하는님의 '알려 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영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영적으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끌어 가고자 하셨고, 이 계획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께서 강림하시면서 현실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행하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명하셨고, 이후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그 예식을 행함으로써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신앙의 은총 안에서 영적인 신비, 곧 파스카 신비의 모습으로(전례 헌장, 2항)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다(전례 헌장, 7항). 구원 역사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신비이신 예수님'을 예식 안에서 만나고 체험하는 '전례의 시기'이며, 우리는 바로 이'신비의 시기'를 살고 있다. 오늘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전례 안에서 신비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그분을 영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만남과 체험이 우리에게 생명의 힘과 구원의 은총을 주는 것이고 그것을 갈구하는 이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며, 전례 안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지는가?

 

 

2. 인간 감각의 성화와 구원 은총의 인식 - 전례의 본질인 성사성

 

전례에 참석하는 이는 '인간' 이며, 그 안에서 구원으 은총을 받고자 하는 이도 '인간'이다. 인간은 매사에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인간적인 감가(sensus humani)'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알아듣는다. 인간이 구원 은총을 알아듣는다면 그 역시 이 인간적인 감각을 통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러나 하는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총은 초월적인 것이어서 제한적인 인간의 감가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면 전례 안에서 은총은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전달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당신의 수난을 대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려고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때 그분의 모습이 해처럼 빛나고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울리는 것을 제자들은 들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이것은 제자들이 이전에 본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었던 그런 모습이요 소리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예전에는 빛나지 않았었는데 그때만 잠시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서 진정 깊이 물어보아야 할 것은 참으로 바뀐 것이 예수님의 얼굴인가 아니면 제자들의 시각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 빛나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처음 지니고 계셨던 신적인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얼굴이 영광스러웠다가 영광스럽지 않았다가 하면서 바뀔 리가 없다. 예수님은 언제나 영광스러운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시다. 다만 제자들의 눈이 인간적인 감각의 제약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인간적 감각이 성화되어 비로소 예수님의 초월적인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뿐이다. 하느님께서 바꾸신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었다.

 

전례 안에서 인간은 먼저 인간적인 감각들을 통하여 구원 은총의 인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며, 하느님께서 그 감각들을 소중히 다루어 주시며, 성령의 은총으로 그것을 성화하여 초월적인 차원으로 열어 주신다. 전례에 참석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노력'(전례 헌장 14항)이란 것은 이 성령의 능동적인 활동하심에 자신의 감각을 내어 맡기는 수동성에 대한 적극성이다. 그저 전례 안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한 맹목적인 적극성은 회중인 신자들을 지치게 만들고 결국 공허한 실패로 이어질 뿐이다. 회중이 전례 안에서 응답하고 환호하고 노래하고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에 최대한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고 그래서 은총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한 적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회중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미리 알아서 배려하고 봉사해야 하는 것은 전례 직무자들의 몫이다.

 

이러한 은총의 체험은 전례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행하는' 수준에서 간으한 것이다.(전례 헌장 34항), 전례는 학교가 아니다. 전례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례에 대하여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은, 곧바로 느끼고 은총의 힘으로 초월에 열리려 하는 인간의 감성을 괴롭게 만들어 버린다. 만일 올바른 전례 참여를 위해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쳐야 한다면 그것은 전례 준비의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이지 전례중에 할 것은 아니다.

 

[신호철 신부 / 김종헌 신부의 전례 & 전례음악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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