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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부활] 오, 기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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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2,045 추천수0

오, 기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수도원 정원에 모처럼 나와 보니 봄이 소리 없이 찾아 와 수도원에 가득하다. 근데 뭔가 허전한 마음이 앞선다. 목련이 있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일까. 맨 먼저 봄소식을 전해 주던 키 큰 목련을 앞으로는 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지난 해 태풍에 넘어가 생명을 마감했기 때문인데, 이외로 그 빈 자리가 크다. 정원을 관리하는 형제가 무슨 나무를 이 자리에 심을까 궁금하다.

 

앞에 소개한 시는 김남주의 “사랑은”이란 시이다. 시인이 읊은 대로 사랑은 살림의 기운이다. 겨울이 상징하는 죽음의 힘보다 더 큰 것이 봄이 상징하는 사랑의 생명력이다. 봄의 기운인 사랑은 온 누리를 생명력으로 되살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고 고백하는 이들이다.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에서 우리가 노래하는 대로, “참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 (Ubi caritas Deus ibi est).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요한 1,1-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icon)” 이시기 때문이다 (골로 1,15).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시어,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습니다” (1요한 4,9).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내면 깊숙이 간직하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의 죄를 보고 또 죽음의 암흑을 겪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O felix culpa)!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부활찬송). 사실 죄는 나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넓은 바다에 견준다면 우리의 죄는 바다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보다 작다.

 

자, 여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확연히 드러난 날이 시작된다. 우리가 희생과 보속으로 40일 동안 걸어온 영적 순례가 완성되는 때이며 전례주년 가운데 절정을 이루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들을 ‘파스카 성삼일’ (Sacrum Triduum Paschale)이라 한다. 성삼일은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로 시작하여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절정에 다다르고 부활 주일 저녁기도로 끝맺는다. 삼일에 걸쳐 파스카 사건이 성취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삼일을 각 요일로 따로 보지 말고 내적으로 연결된 하나인 사건으로 봐야한다.

 

사실 파스카(과월절)는 원래 목축업자들이 봄에 가축을 위해 신의 축복을 비는 축제였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또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지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파스카 축제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출애 12장). 목축업자의 파스카가 히브리인의 파스카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구약의 파스카는 신약의 파스카를 위한 준비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개인적 파스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용서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완전한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고린 5,7 참조). 우리를 위한 사랑이 성취한 구원의 날, 고통과 죽음을 넘어 생명이 넘실거리는 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히 남을 사랑과 자비가 환히 드러난 이 신비를 거룩한 삼일에 걸쳐 경축한다. 파스카 성삼일의 전체 구도와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예식과 전례 예식이 표현하고 있는 주제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파스카 성삼일의 개막

 

성목요일 저녁 최후만찬 파스카 예식 주님 만찬 미사

 

진정한 성삼일

 

성금요일 십자가 그리스도의 희생 수난 거행

성토요일 무덤 그리스도의 안식 시간전례

부활주일 빈 무덤 그리스도의 부활 파스카 성야

 

성목요일 만찬 미사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담겨있는 성체성사의 제정을 거행한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성찬례로 승리의 전망 안에서 당신께서 다음날 이루실 봉헌에 미리 참여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당할 죽음의 의미에 대해 예언하셨고 그것을 빵과 포도주의 성사적 표지로 제자들에게 남겨주셨다. 이제 누룩 없는 빵은 십자가상에서 당신이 내어주실 몸이고 찬양의 포도주 잔은 당신이 흘릴 피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과 살림의 행위였다. 이 성체성사의 의미가 형제애 넘친 섬김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세족례). 그래서 이 저녁은 잔치 분위기이고 서로 나누는 가운데 사랑과 생명력이 넘친다.

 

이 사랑과 생명을 불모의 땅에서 실제로 노래하기 위해서는 제 뼈를 갈고 재로 뿌리는 고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한다. “나무가 싱싱할 때 찍어 버리자. 인간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예레 11,19). 여기서 우리 인간의 죄성이 폭로된다. 우리는 수난 거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한다.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성금요일 제1독서). 그래서 골고타라는 불모의 땅에 심은 십자가는 인간에게 금지되었던 생명나무인 것이다 (창세 2,9; 3,24 참조). 이제 모든 사람은 생명나무에 가서 열매를 딴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도다”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식). 생명나무에 구원이 열매 맺었다.

 

이제 깊은 침묵의 날이 시작된다. 유대인의 안식일인 성토요일이다. 성찬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참으로 단식의 날인 것이다. 시간전례만 거행된다. 깊은 침묵 가운데 단식하며 생명의 “봄을 기다리는” 준비의 날이다 (요한 19,42 참조). 생명의 주인이 무덤에 누워계시다. 더 나아가 이 분은 죽은 이들의 세계인 저승에 내려가서 아담을 비롯한 구약의 성조들을 만나 구원하신다 (1베드로 3,19-20; 4,6). 안식일에도 사랑의 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시기” (요한 5,17) 때문이다.

 

안식일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생명 자체이신 분이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오신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1요한 3,14). 그렇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께서 이제 새로운 생명의 주인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위대한 이 밤 사랑의 빛이 우리 존재와 온 누리를 비추고 (빛의 예식), 세상 창조 때부터 시작된 사랑과 살림의 긴 역사가 선포된다 (말씀 전례). 그리고 우리는 성자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흠뻑 잠기고 (세례 예식), 사랑 자체이시며 부활하신 아드님을 실제로 모신다 (성찬 전례). 하늘과 땅이 결합된 이 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며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일으키셨다. 사랑이 죽음과 어둠에 승리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요한 13,1)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죽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우리는 삶으로 노래하리라.

 

“이 날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시편 117).

 

[성서와함께, 2004년 4월호, 인 끌레멘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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