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월] 위령 성월 유래와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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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1-03 | 조회수2,956 | 추천수0 | |
위령 성월 유래와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 죽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
-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최후의 심판'(15세기).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하늘 나라에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우리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난 그들도 지상에 남겨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믿는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위령성월을 맞아 위령성월 유래와 함께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알아본다.
위령성월 유래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약 마카베오기에 나온다. 기원전 2세기 유다 민족 지도자인 마카베오는 전쟁터에서 죽은 유다인 장사를 지내면서 그들이 지은 죄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와 헌금을 바쳤다.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기원후 2세기께부터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교회 초창기 로마 카타콤바(지하묘지) 안에 새겨진 기도문에는 죽은 이들이 죄를 용서받아 천상 행복에 들게 해달라는 내용이 많았다.
교회는 이러한 기도 관행을 연옥 교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천국에 들기 전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는 상태를 뜻하는 연옥은 13세기 리용공의회와 15세기 피렌체공의회를 거쳐 1545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교회 공식 가르침으로 선포됐다.
한편 609년 교황 성 보니파시오 4세는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지정하고 교회력에 축일이 따로 없는 성인들까지 기억하도록 했다. 이후 998년 프랑스 클뤼니수도원 오딜로 원장은 모든 성일 대축일 다음날인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는데, 이런 관습이 보편화되면서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게 됐다.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
그리스도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이 세상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관문이기에 적극적 자세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죽음관이다.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을 떠난 인간은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천국 △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연옥 △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 등 3가지 상황 가운데 하나에 처하게 된다.
이 같은 개별심판(사심판)에 처한 인간은 종말이 오면,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모두 부활해 최후심판(공심판)을 받는다. 이때 의인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지만 악인은 단죄를 받게 된다. 종말의 시기와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하느님만이 아신다.
천국과 연옥, 지옥을 인간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요즘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따른 상태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죽음에 관한 가르침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먼저 인간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연옥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기에는 부족한 인간이 생전에 죄를 지은 것이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면서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상태다. 인간은 연옥 상태에서 자신을 정화하며 하느님과 하나 됨, 즉 천국을 갈구한다. 연옥 영혼은 최후심판 때 구원을 받는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이다. 연옥 영혼들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 등으로 도움을 받는다. 이른바 통공(通功) 신앙이다.
천국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룸으로써 누리는 충만한 기쁨의 상태다. 천국은 추상적 개념이나 하늘 위에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인격적 관계다.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성찬례와 자선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살았던 사람이 죽는 순간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체험하는 것, 그것이 천국이다.
지옥은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이 절망과 악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현세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을 체험할 수 있다. 종말은 전적으로 하느님 일이다. 종말 때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래도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만 싶은 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죽음을 통해 참되고 아름답고 복된 새 생명에 들어간다고 해서 죽음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간혹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두렵고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요, 고뇌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살고 싶은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국 당신 사랑과 그 사랑이 베푸는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좋은 준비는 나날이 이 믿음을 깊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 준비이다."
[평화신문, 2012년 11월 4일, 남정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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