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상징] 거룩한 표징: 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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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2-11-11 | 조회수2,657 | 추천수0 | |
[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성작
1983년 비엔나의 도나우 공원에서 거행된 오스트리아 가톨릭의 날 기념 미사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오스트리아 크렘스뮌스터(Kremsmunster)에 소재하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9세기에 만들어진 타실로 성작(Tassilokelch)을 사용하셨습니다. 유럽에는 이처럼 귀중한 성작 이외에도 다른 많은 소중하고 오래된 성작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작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이 끝날 무렵 높이 들어 올리신 잔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잔을 주시며, 그것이 죄를 용서해 주려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릴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6,27 이하 참조).
최후만찬 때의 성작은 다음날인 성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공포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아버지께 그 쓴잔을 피해 갈 수 있도록 청하셨습니다(마태 26,39 참조). 그 고통의 잔은 죄인인 인간이 마셔야 마땅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우신 분노의 잔입니다. “나의 주 예수님, 당신께서 고통을 감내하시는 것은 저의 탓입니다.”라는 아주 오래된 ‘사랑하올 예수님’이라는 제목의 수난노래 첫 소절을 즐겨 부르게 됩니다.
최후만찬의 성작은 기쁨의 잔인 동시에 축복의 잔이기도 합니다. 이 잔은 가끔 기쁨의 잔치로 묘사되는 영원한 생명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에 관한 마태오복음의 증언에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도래할 하늘나라에서 거행될 성찬 식탁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도록 청탁한 제자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르 10,38) 하고 물으셨습니다. 순교자들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통의 잔을 온전히 마셨습니다. 그들은 또한 깊은 확신으로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천상 기쁨을 미리 맛보았습니다. 기쁨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그 자신이 기쁨의 원천이 되는 힘을 얻습니다. 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갈증을 달랠 수 있는 ‘새 포도주’를 담아 두는 잔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시기 위해 제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여러분 자신(유일한 몸)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보는 것이 되십시오.”라고 한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미사를 거행할 때 성작을 높이 들어 올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작으로 나누어 마시도록 하는 것은 주교와 사제의 직무 수행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무 수행에 속합니다. 그래서 중세 때에는 주교들과 그리고 때로는 사제들에게 주석, 납, 또는 밀랍으로 만든 소박한 성작을 무덤에 넣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 통상적으로 성찬례를 위한 성작은 오래전부터 주로 금이나 은을 입혀 귀하게 만든 금속으로 제조하였습니다. 성작을 이렇게 귀중하게 제조하는 까닭은 그 안에 감추어진 존귀함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2012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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