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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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7-01 | 조회수9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마태 8,18-22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요즘 시대에는 우리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거리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지요. 머리로는 하느님을 선택해야 함을 알지만, 막상 그러자니 그러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세상의 것들이 아쉽고 그것들 없이 지내야 할 팍팍한 삶이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것들을 선택하자니 왠지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마음 편히 세상의 것들을 택하고 누리며 살았을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지요.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로 한 번 선택했으면 그만입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신 사랑의 복음에 마음이 끌려서,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싶어서 신앙의 길을 선택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나 어중간한 양다리 걸치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꾸만 ‘사람의 일’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바로 세우고, ‘하느님의 일’을 추구하며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그분을 반대하고 배척하는 율법학자 무리에 속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미 그분의 ‘제자’ 무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가 주님을 따르는 일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는 아마 외적인 부분들에 마음이 끌렸나 봅니다. 군중들을 가르치시는 화려한 언변과 심오한 지혜,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강력한 카리스마,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언젠가 그분의 ‘나라’가 도래했을 때 ‘한 자리’ 차지하여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지, 우리 위에 군림하시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 해보겠다는 심산이라면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부터 다시 한 번 제대로 생각해보라는 것이지요.
한편, 원래부터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 공동체에 속해 있던 한 사람은 그분을 따른다고 해서 세속의 부귀영화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따르기 전에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나름 합당한 핑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며 주님을 따르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다가 흐지부지하게 만들 심산이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일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건너가야만 우리의 존재 또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내 시선과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이익을 기꺼이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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