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고해가 성사가 아니라 상담이 되어가는 이유> 복음: 마태오 10,1-7
LORENZETTI, Pietro 작,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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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악한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할 힘을 주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누구에게는 주시고 누구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파견 받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 혹은 하늘 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자녀를 탄생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녀는 세례 때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죄란 그리스도처럼 하지 못하는 게 죄입니다. 아기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아이가 때가 되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아이는 부모처럼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옹알이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걸음마를 시작 할 때 2천 번을 넘어진다고 합니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왜 넘어졌느냐고 하며 상담해 주는 일이 아니라 양식을 주며 다시 한번 노력해 보라고 하는 역할입니다.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2천 번씩 그냥 용서하고 보아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으면 결국 이 세상에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역할을 하라고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같은 죄를 계속 짓느냐고 뭐라 하고 또 그러한 죄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고해하는 이를 지나치게 불편하게 하는 것은 더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사제가 고해 성사 할 때 그냥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 야단을 치거나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어 마치 상담가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 안에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스스로 무언가 더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고 이것이 신자도 힘들게 하고 사제 자신도 힘들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를 믿기 위해서는 외적인 표징을 자신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하루에도 몇 개씩의 그림을 그렸고 자신도 분명 그림을 잘 그릴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잃게 되었고 결국 그림 그리는 의미를 잃고 자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믿는 표징은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하느님께서 주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마치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특정 사제에게만 주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에서 한 아기의 머리에 입맞춤 했을 때 뇌종양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신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봅니다. 그러니 다른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당신도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때 경찰이 심문하듯이 물어보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그냥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악령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시도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제 자신의 믿음도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마치 임금이 암행어사에게 주는 마패와 같습니다. 마패를 잃어버렸다면 암행어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암행어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사제에게 악령을 쫓아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믿고 아프면 무조건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서로가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제가 자기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성령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