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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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11 | 조회수9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7/11일) : 연중 14주간 목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 제1독서 : 호세 11, 1-4. 8-9 * 마태 10, 7-15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오늘의 강론(1)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거저 받앗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 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너 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 오늘의 강론(2) : 사부 성 베네딕토 대축일(루카 22, 24-27)
오늘은 ‘사부 성 베네딕토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부 베네딕도께서 말씀하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규칙서 7,34)라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곧 지금 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지”(규칙서 58,7) 물어봅니다.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신앙생활(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약해서’ 신앙생활에 대한 열성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 또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을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들여다봅니다. 또한, [규칙서] 머리말에 나오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9절)라는 말도 되새겨 봅니다. 곧 나는 진정,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서 신앙생활(수도생활)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은 특별히 ‘건강’과 ‘질병’에 가장 민감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상처’와 ‘아픔’, ‘모욕’과 ‘무시’,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처사’를 받았을 때, 무척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훼손되거나 손해 보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반면, 자신에게 ‘관심 있고 이익이 되는 일’에는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듭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체 왜 그럴까요? 이러한 현상에서, 우선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시대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입니다. 곧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입니다. 자신을 향하여 있고,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는 경향입니다. 그 바탕에는 ‘자신에 대한 애착’과 ‘자애심’, 그리고 ‘이기심’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사라져 버린,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깔려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라는 수면제에 취한 환자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깨어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속정신’에 빠져 있기는 신앙인들도 수도자들도 비 신앙인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만 보이는 것은 혹 제 눈이 잘못 본 것일까요?) 그러나 사부 베네딕토께서는 [규칙서]의 머리말 첫 문장에서 “수도승”을 ‘자기 뜻을 포기하는 자’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4,10)고 말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자기 것이 아님을 알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규칙서] 3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부께서 제시한 ‘하느님 찾기’는 자기를 손해 보는 ‘자기포기’와 더불어 진행됩니다. 곧 수도생활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싸우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편, ‘자애심’과 ‘이기심’에 바탕을 둔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라는 이 ‘세속정신’의 바탕에는 더 무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바로 ‘불신앙의 소치’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고, ‘자신을 중히 여기는’ 바람에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기에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있고,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않기에 자신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고자 하고, 그러다가 안 되면 절망하고 불신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고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사랑’하기를 배우기보다 ‘불신’에 떨어진 까닭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신앙들도 수도자들도 그러고 있으니, 참으로 ‘불신앙이 자리 잡은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C.S.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신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이는 비신앙인이나 무신론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수도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곧 신앙인이면서도 신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익명의 그리스도인; 실천적 무신론자). 그저 자신의 평안과 행복만 중시하는 일종의 웰빙영성을 추구하며, 종교마저도 개인화 되고 사적인 일로 사사화(私事化) 되어갑니다. 심리학자 켄 웰버의 말처럼, ‘해괴한 나르시즘적 퇴행’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도, 사고도, 고통도, 허물도, 죄도 아닙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그분을 향하여’ 있지 않음이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 때문에 바로 그 순간,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성공과 승리에서만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질병, 고통과 상처, 무능과 실패를 통하여, 바로 그 속에서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함으로써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당신이 주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믿음의 이해 지평’을 넓혀주고, 당신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도록 이끄시는 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온갖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육체의 한계, 능력의 한계, 기능과 재능과 물질의 한계, 시간과 공간의 한계, 지식과 생명의 한계, 그 어느 것 하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전부를 할 수 있고 전부를 가질 수 있는 양, 전부를 알 수 있고 전부를 아는 양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면서도 또 절망에 빠지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희망을 둘뿐 하느님을 향하지 않기에, 끝없이 한계들을 마주치면서도 정작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곧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과 주어진 존재이고 진정한 주님이 계심을 믿고 ‘의탁’하는 일로 건너가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사부 성 베네딕토께서는 우리를 이 ‘불신의 길’에서 벗어나 ‘겸손한 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찾기’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인용하여,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규칙서 머리말 35; 마태 6,33)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낫게 여기지 말라.”(규칙서 4,21;72,11; 5,2 참조)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자 수도승의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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