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보나벤뚜라 주교학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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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7-14 | 조회수278 | 추천수4 | 반대(0) |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사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임마누엘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 성당이 폭격을 당했고, 성당 앞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도 폭격으로 손이 부서졌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다. 네가 나의 팔이 되어다오.” 성당을 복구하면서 예수님의 동상은 팔이 없는 그대로 보존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임마누엘’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의 지나온 날을 영상처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옆에는 발자국이 같이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제 옆에 저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에 늘 함께 있었단다. 젊은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째서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제 곁에 없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란다.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임마누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임마누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영광의 순간에도, 절망의 순간에도, 기쁨의 순간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2번이나 차와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인도를 걸어가는데 후진하던 차와 부딪혔습니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횡단보도의 파란불에 걷고 있는데 좌회전 하는 차와 부딪혔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 와서 신부님들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미션엘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서행하던 우리 차를 뒤에 오던 차가 받았습니다. 차 트렁크의 유리가 깨지고, 파손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에는 인색했습니다.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려 했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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