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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마태오 11, 25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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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16 조회수109 추천수2 반대(0) 신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 (11,25~27)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빠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 어느 수녀원에 미사 갔을 때 그 수녀원 복도에 걸려 있던 “나이가 들면 세상의 눈은 멀어지지만, 영적 눈은 점차적으로 밝아진다.”라는 표현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아픈 다리는 낫지 않고, 눈도 귀도 멀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마음도 굳어져 가는 듯해서 이런 저를 보면서 저도 마음이 여간 불편합니다. 작은 것인데도 예전처럼 잘 참지 못하고, 급한 성격이 더 급해지는 것 같아서(=나이 들면 다 그런다고 하던데 저만 그런가요?) 요즘 거의 말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갑니다. 혹여 대화하다 보면, 서로 불편해지지 않도록, 보고도 보지 않은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하면서 말문을 닫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고루한 관점을 마치 지금에도 맞는 것처럼, 우길 땐, 참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철부지처럼, 다만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아직은 그렇지 않네요. 하느님 앞에 작은 자의 삶과 숨은 가난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 데 그렇지 못한 저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하느님 안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전적인 신뢰와 의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11,27) 그래서 아버지를 알고 아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지적인 앎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앎, 사랑의 앎에서 오는 지혜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을 수 있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신비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11,25~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불행하다, 는 예수님 말씀과 대비되고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을에선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했었으며,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앎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 병이다, 는 표현처럼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생명의 빛을 보지 않았고, 귀를 틀어막고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대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 의로움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11,27)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지식과 지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듣고 배운 것이 흘러넘쳐 오히려 부족함만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습니다. 과유불급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로써 지나친 하느님에 관한 지식 과잉이 오히려 하느님을 살지 못해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지식 과잉이 하느님보다 우선하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우위에 둘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공간이 충분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든지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자세나 가진 것이나 경험한 것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힘써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터득한 슬기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다만 예수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온전히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을 살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1,2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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