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마태오 12, 1 - 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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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7-18 | 조회수11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12,7) 우리 모두 공감하지만, 세상 살아오면서 많고 많은 서러움 중에서 참으로 서럽고 서러운 것은 배고픈 서러움과 집 없는 서러움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모두 한때 그런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서러움에서 벗어난 것은 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희생과 교육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 되는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12,1~8) 어쩌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해, 그 서럽다는 배고픈 서러움을 겪어야 했나 봅니다. 물론 그런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모르신 것이 아니라 알고 계셨음에도 저지하지 않으신 것은 율법 규정 보다 제자들의 배고픔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따른 자비의 이해이며 배려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찮게 여기신 것은 분명 아니셨지만, 그분은 율법 규정 그 자체보다는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도록 가르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종종 율법주의자들을 꾸짖고 그들과 대립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위선적이고 율법주의적 편협한 시선과 처신에 직면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율법과 안식일 법에 관한 생각을 피력할 기회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은 단지 바리사이만이 아닌 제자들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예수님의 깊은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빌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12,7;호세아6,6참조)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껏 바리사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 자비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언행을 통해 공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7)라는 말씀은 안식일을 종교와 인생의 목적과 같이 절대화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과 안식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비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느님에게로 향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율법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안식일 규정 포함)으로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살려내신 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다만 율법의 본뜻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래의 의미와 의도는 퇴색되어 버렸고, 결국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모든 삶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히려 율법과 안식일이 사람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이란 장벽을 허물고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셨는데 그분의 의도는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는 말씀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율법의 규정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지도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의식과 태도는 거룩함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과 통찰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곧 자비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냐’, ‘거룩하신 분이시냐’는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 관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사느냐에 따라 신앙인과 공동체의 생활 태도와 행동이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거룩함은 비판적, 회의적인 태도이며 이는 결국 분리- 분열- 차별- 적대로 드러나며 이는 곧 자기 보존이 최우선입니다. 이에 반해 자비함은 긍정적,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타인과의 일치- 친교- 존경- 환대를 우선시하며 타인에 대한 지지와 나눔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놓쳐버린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과 통찰로 살아가도록 자비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느냐가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지만 어떤 면에서 익숙한 거룩함보다 익숙하지 않은 자비를 지금은 살아야 하는 때라는 점입니다. 더 중요한 게 있고 덜 중요한 것인지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거룩함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면, 예수님은 자비를 더 중요시하고 자비를 우선해서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남에게 어떠한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도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였다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이 오게 된다.” (플라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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