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예수님처럼, 어머니처럼, 새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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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20 | 조회수99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한결같이, 항구히 하느님 사랑의 품이 되어 삽시다”
“주여, 당신 은총이 어이 이리 귀하신지. 인간의 자손들이 당신 날개 그늘로 숨어드나이다.”(시편36,8)
오늘 7월20일은 엘리야 수사의 영명축일이고 어제 저녁식사때는 조촐한 축하식도 가졌습니다. 오늘 새벽 성무일도시 ‘2열왕2,1-15’까지 말씀도 참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는 장면이 릴레이 경주시 멋진 바튼 텃치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복입니다. 엘리야가 참 살으니, 주님께서는 참 좋으신 후계자 엘리사를 마련해 주심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부터가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후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였고 이런 낌새를 알아챈 주님은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그러자 암탉을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군중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절대 침묵을 명령하십니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12,1-4)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인용하시며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신원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섬세하고 고요한 모습이, 자비롭고 지혜로운 주님의 종의 모습이 흡사 하느님의 품, 예수님의 품 같고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 생각난 일화가 있어 나눕니다.
수도형제로부터 제주도에 사는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 <막달라> 서문 '추천의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6월26일부터 7월15일 완성되기까지 정말 20여일간 달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고자 품고 있는 암탉처럼 자나깨나 마음에 품고 지내며 묵상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어느 자매와 나눈 내용입니다.
“신부님, 잘은 모르지만 작가님도 너무 감사하실 것 같아요. 마음의 깊은 내면의 감정을 울리는 서문이세요.” “온힘을 다해 썼네요! 20여일 동안 마음에 품고, 마치 병아리들을 부화하기위해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처럼! 매일 그렇게 탄생되는 강론이랍니다! 재미있지요! 이렇게 어머니 모성애母性愛를 체험합니다!” “아, 맞아요. 신부님!! 샛강 조그마한 연못에서 오리가 알을 품고 부화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모습을 여러번 여러해 봤습니다. 그러나 끝내 부화시키지 못하드라구요. 남편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오리를 어찌나 보호하던지요. 먹을 것을 줘도 꼭 같이 데리고 나와 먹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미물도 저러할진대 사람 못된 인간은 왜 그리 생겨먹은건지 혀를 찰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매님, 유심히 관찰하셨네요. 감동적인 일화! 강론에 인용하고 싶습니다.”
마침내 오늘 강론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어미품을 찾아 날아 오는 새들처럼 하느님의 집 수도원의 품을 찾아 끊임없이 날아오듯 걸어오는 형제자매들입니다. 마침 김훈 작가의 새에 대한 묵상글도 생각났습니다.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사람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하늘을 나는 모든 새는 그 어미가 체온으로 품어서 태어나는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감동적인 고백이요 자신의 무정無情, 무지無知했음을 반성케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날마다 마음 깊이 꼭 품었다 쓰는 강론이어야 되겠다 다짐을 새로 합니다. 사실 이렇게 마음 깊이 품었다 부화하듯 쓰는 매일 강론이었고, 홈페이지에 올리면 인터넷을 통해 온세상으로 퍼져 날라 가니 흡사 강론이 살아 있는 ‘은총의 새’, '희망의 새', '사랑의 새', ‘축복의 새’ 같다는 은혜로운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더욱 이렇게 강론도 쓰고 자비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품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도 새로이 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아. 예수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은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13,34)
바로 암탉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종 예수님은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주님의 종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강인한 인내에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어머니 품같은 예수님에게서 참 목자상을, 참 영성적 삶을 배웁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종이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이사12,1-4)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제1독서의 미카 예언서에서 질타의 대상인 무자비하고 불의한 부자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자비하신 주님의 품을 떠날 때 구제불능의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이런 부자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선고이자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하느님의 품을 떠나 무지의 탐욕에 눈이 멀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광야 인생 여정중인 우리 모두가 자애로운 주님의 종, 주님의 품이 되어 살게 합니다.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만군의 주님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 지키고 건져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31,5).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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