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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사랑하면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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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22 조회수99 추천수2 반대(0) 신고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20,11-15ㄱ).”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1)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해서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아닐 것이고, 마리아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특별한 점’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마리아가 좀 더,

 

또는 아주 많이 앞서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실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박해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는데(요한 20,19.26), 마리아는 박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모습은 ‘사랑은 함께 있음’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몸’만 함께 있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과 함께 있으려고 노력해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면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사도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26,40).

 

아마도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2,37-39).

 

이 말씀을,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바치는 일.”이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고, 그렇게 다 바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그렇게 다 바치면,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 라는 존재는 녹아 없어지고,

 

내 안에 주님만 계시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내 안에 주님만 사시고

 

더 이상 나는 없는” 단계를 잘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부활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그 단계에

 

도달해 있었고, 사도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들도 모두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치’입니다(요한 17,20-26).>

 

 

 

3)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울지 마라.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으니.”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울지 마라. 내가 이렇게 네 앞에 살아 있으니.”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과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마리아는 천사들의 말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랑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부활 신앙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던 때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데(요한 20,16),

 

그 일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눈을 열어 주신 일입니다.

 

<마리아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주도권은 언제나 항상 예수님 쪽에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에도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알아보았는데(루카 24,30-31), 그 일도 역시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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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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