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이수철 신부님_참가족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4.07.23)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23 조회수103 추천수6 반대(0) 신고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주님, 저희에게 생명을 돌려 주시어,

 당신 백성이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85,7)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예수님의 참가족’이었고, 이에 착안해 강론 제목은 ‘참가족,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복음의 장면과 흡사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분들의 공동체요, 우리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바로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입니다. 

 

새삼 혈연血緣의 가족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님 안에서 신연神緣의 참가족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사실 요즘 1인 가족의 증가와 더불어 혈연의 가족공동체도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형성되는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해지는 보편적 현실입니다. 

 

지난 주일 참으로 오랜만에 20-30대 성당 청년부 13명의 피정지도를 하면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생생합니다. 인생을 일년사계로 요약하면 모두가 봄철에 해당되는 싱그러운 젊음으로 밝은 얼굴에 밝은 웃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젊음 자체가 축복’임을 드러내는 분위기였습니다. 대부분 가을철 인생들이 피정을 자주 오는데 이렇듯 봄철 인생을 맞이하기는 처음입니다. 청년들이 요청한 강의 주제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였고 저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는 예수님 중심의 질서있는 공동체입니다. 중심과 질서가 중요합니다. 중심과 질서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그러니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어울린 공동체여야 합니다. 조화가 중요한 것이지요. 서로 맞추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이신 예수님께 맞추세요. 그러면 저절로 다양성의 조화로운 일치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계입니다. 한계를 넘지 마시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세요.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합니다. 서로간에는 거리를, 자기 분수의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겸손과 예의가 필수입니다. 이래야 예수님 중심의 참 좋은 가족 공동체의 형성이자 실현입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잡힌 삶이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유독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의 삶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이요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내 공동체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은 날로 커집니다. 공동체로부터 받는 상처보다는 입는 은혜가 백배는 클 것입니다. 어제 읽은 두 편의 시를 나눕니다. 벨라루스의 시인 막심 박다노비치(1891-1917)의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라는 시입니다. 공동체 삶에 지혜를 일깨워 주는 시입니다.

 

“우리 삶에 수많은 길이 있어도

 다 무덤으로 향한다

 뚜렷한 희망과 두려움 없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만나겠지

 그리고 자신에게 묻겠지

 하필이면 멀고 험한 길을 택해서

 왜 모르는 곳을 향해 외롭게 걸었을까?

 그리고 왜 온 힘을 들여

 그렇게도 급하게 걸어 왔을까?

 조용히 기어가는 지렁이도 무덤 바로 앞에서

 우리를 따라 잡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노년에 쓴 시가 아니라 25세 결핵으로 죽어가며 쓴 깨달음의 시입니다. 죽음 앞에 참으로 겸허하라는, 너무 유별나고 힘들게 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조용히 평범히 작게 살라는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시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자각케 하는 글입니다.

 

어제 70년대를 풍미하면서 여전히 영원한 현역으로 활약해온 ‘아침이슬, 상록수의 음유시인 김민기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7월21일 지병인 위암으로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는 지금도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떨어지는 나뭇잎들처럼 세상을 떠나는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현재 공동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또 하나 정현종 시인의 오래된, 그러나 유명한 단 두 줄의 ‘섬’이라는 시에서도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이 상징하는 바 누구나 염원하는 외딴곳의 쉼터이자 동시에 서로의 소통을 매개하는 모두의 중심인 구원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 한 복판에 섬처럼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입니다. 혈연의 가족이 당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당신 주위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혈연의 피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렇다 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에 대한 폄훼로 오해해선 안됩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평생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데 전념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자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고 배우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미카 예언서는 미카 예언자가 이집트에서 탈출의 구원업적을 이뤄주신 하느님을 회상하며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예루살렘의 기도는, 미카의 예언은 마침내 새로운 파스카 예수님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변한 미카 예언자의 기도와 고백이 혼성된 간절한 청원입니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십시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미카 예언자의 놀라운 일들을 보여 달라는 간청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달라는 간청이 마침내 오늘 복음의 파스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를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