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거진 성당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잠 때문일까 세 시간 자고 깼습니다.
일어나 복음을 읽고 묵상을 시작하는데
왕파리 한 마리가 제 방에 들어와 왱왱대며 방을 이리저리 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불을 켰기 때문에 들어 온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낯선 곳이었기 때문인지
왜 왕파리가 한밤중에 내 방에 들어왔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파리가 제 방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왕파리가 들어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왕파리는 그저 왕파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신 하느님의 사신일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행진 첫날부터 하느님께서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라고.
왕파리가 들어왔네 하고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그렇게 지나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저를 지나치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이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지나치는 것일 겁니다.
‘왕파리가 내 방에 들어왔네!’가 아니라
‘왕파리가 들어왔네!’ 그저 그 정도이면
생각이 왕파리에 머물지 않고 지나치듯
하느님께서 왕파리와 함께 제 방에 들어오시고 저를 찾아오셨어도
제 생각이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얼마든지 지나쳐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놓친 왕파리가 얼마나 많고,
그렇게 놓친 하느님이 얼마나 많을까?!
하느님 말씀도 그렇게 많이 내게 오셨어도 그렇게 많이 놓쳤을 것입니다.
왕파리가 아니라 풀벌레와 함께 오셨을 때도 있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들과 함께 오셨을 때도 있고,
구름과 비와 천둥 번개와 함께 오셨을 때도 있었을 텐데 놓쳤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 말씀도 이렇게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수없이 많이 만난 남자와 여자들이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남자와 여자들이었거나 미친년 놈들이었지
내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고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이 하느님께 미치지 못하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말씀과 뜻도 지나쳤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누이들을 시켜서 말씀하셨는데도
웬 여자가 지껄인 말로 지나쳐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시켜서 말씀하셨는데도
웬 놈이 씨부려댄 말로 지나쳐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았고,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주님의 형제와 누이와 어머니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밤중 제 방에 들어와 이것을 깨닫게 해준 왕파리가 고맙고,
하느님께 감사 기도드리는 거진 성당의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