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회심의 생활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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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26 | 조회수8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누구나 좋은 땅의 마음 밭이 될 수 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8,15)
오늘 복음 환호송 성구가 은혜롭습니다. 오늘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두분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가 되는 분입니다. 두분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일체 없고, 위경인 <야고보 원복음서>가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분들에 대한 기념은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생겼고 많은 교부들이 즐겨 <야고보 원복음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어제 자료에서 읽은 전설같은 일화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요아킴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부유한 인물이었고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이었으며 둘의 걱정은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요아킴은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자 광야로 갔고, 안나는 집에 홀로 남아 역시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마침내 응답을 받는다. 한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을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예고하자 안나는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기로 약속했고,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비슷한 환시를 보고 기뻐한다. 때가 되어 안나는 딸을 낳았고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세 살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한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아이가 바로 마리아 성모님으로, 이런 기적같은 일화는 주변에서도 간혹 듣기도 합니다. 아마도 요아킴과 안나는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 네 번째 부류의 ‘좋은 땅’의 부부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기념일 전례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봅니다. 이분들을 기념하는 전례는 그 아득한 옛날인 6세기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8세기 이후 서방교회에 도입됩니다. 안나는 13세기 이후 7월26일로 축일을 지냈고,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15세기후이후 발전하여 1913년에 9월16일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이분들의 축일은 함께 7월26일 오늘로 확정되어 지내게 됩니다. 성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안나보다 못하지만, 두분에 대한 신심은 가정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가 됨으로, 요아킴과 안나 부부는 교회의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도 이런 신심깊은 부모를 보고 배웠을 것이며 예수님 역시 이런 외조부모의 삶을 통해 보고 배웠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도 해봅니다. 오늘날은 거의 드물지만 제 어릴적 농경사회 대가족제도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역시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은 지금도 많고 생생합니다. 할머님계신 큰집에 가서 할머니와 잔적도 많았고, 겨울철 할머니는 벽장에서 홍시 감을 꺼내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겨울철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예전 할머니들의 권위는 대단했고 손주들에 대한 애정은 참 각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비유에 대한 해설을 초대교회의 산물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각도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씨가 아니라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토양의 밭에 있습니다. 씨가 아무리 좋아도 땅이 척박하면 제대로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된 농부는 기름진 밭을 만들기 위해 온갖 거름을 주며 최선을 다해 땅을 돌봅니다. 과연 내 마음 밭은 어디에 해당되는지요?
첫째, 길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하늘 나라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했을 때 악한 자가 즉시 회수해 가는 것을 지칭합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 부재가 문제입니다. 둘째, 돌밭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나 그 사람 안에는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니,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걸려 넘어집니다.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함이 문제입니다. 셋째,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듣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문제입니다.
세 경우 모두가 시공을 초월한 인간 현실입니다. 이런 마음 밭은 고정불변의 현실일까요? 과연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자 말씀이 희망적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라.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 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다.”
메시아 도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오늘 목자들중의 목자이신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며 참 좋은 수행 덕목을 선택, 훈련, 습관화 하도록 해줍니다. 고정불변처럼 생각되는 앞서의 세 유형의 부정적 마음 밭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입니다. 진짜 영적 농부는 마음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온갖 유익한 수행의 훈련에 전념합니다. 옛 어른이 말씀도 생각납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을 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바로 후회다.”<다산> 저는 후회를 회개나 회심으로 바꿔 읽습니다. 한두번도 아닌 끊임없는 회심이 좋은 마음밭으로 변모시킴은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성인과 광인의 구별은 오직 뉘위침에 있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역시 뉘우침은 회개나 회심으로 바꿔 읽고 싶습니다.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진인사대천명의 간절한 삶이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킵니다. 마침내 모두가 선망하고 희망하는 네 번째 유형의 인간입니다.
넷째,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낼 정도로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그대로 렉시오디비나, 성독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한결같이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고, 실행하고”의 렉시오디비나의 수행에, 영적훈련에 매진할 때,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제 아무리 박토같은 마음 밭도 옥토의 마음밭으로 변모됩니다.
새삼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수도원 일과표에 따른 삶이 좋은 땅의 마음 밭에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회심의 생활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조화된 수도원 일과표에 따른 영적훈련이, 무엇보다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의 영적훈련이 얼마나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키는지 역시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역시 타고난 것들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바로 타고난 것들에, 나쁜 환경에 절망하는 것, 이것이 악마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항구한 노력이 사주팔자 운명론을, 나쁜 환경을 돌파해 버립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을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변모시킵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31,10ㄹ).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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