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밀이냐 가라지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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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27 | 조회수67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공존의 사랑과 지혜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5)
오늘도 계속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가라지의 비유로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예수님은 역시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죽어서 시작되는 하늘 나라의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가라지의 신비는 악의 신비입니다. 복음은 이어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며 간략히 악의 정체인 가라지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악의 신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매사 사건이나 병들 역시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병의 신비, 사건의 신비라 뭉뚱거려 지칭할 만 합니다. 그러니 신비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심연의 늪에 빠질 뿐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원인을 해명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이 처방입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 묻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답은 그대로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바로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공존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밀과 가라지를 분별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처리하기도 난망합니다. “공존의 사랑과 지혜, 밀이냐 가라지냐?”,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사람의 판단은 얼마나 불확실한지요? 과연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볼 수 있겠는지요? 가라지인줄로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내눈에 가라지이지 타인의 눈엔, 하느님의 눈엔 밀일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 삶의 현실에서 바뀔수도 있습니다. 밀같은 존재가 가라지로 타락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은 존재도 개관천선의 은총으로 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발본색원, 과연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을런지요? 인류의 혁명과 전쟁사가 불가능함을 입증합니다. 도저히 악순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의 괴물과 싸우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됩니다.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묘연할뿐입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하는 악의 현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인터넷이나 신문을 들여다 보면 온통 가라지밭 같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데 진리의 승리를 말하지만 악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역사는 조금씩 진보한다 하지만, 현재 갈수록 악화되는 지구의 현실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라는 역설의 현실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정말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 대해 회의하실까 생각도 듭니다.
우리 자신만 봐도 악의 존재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마음밭입니다. 말 그대로 밀과 가라지가,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이 혼재하는 마음밭입니다. 순수한 천사도 순수한 악마도 없는 이 둘이 함께하는 인간존재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악의 실체도 모호할 뿐 아니라. 실제 뽑을 수는 없습니다.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선과 악에 대하여'라는 글이 깊은 통찰을 줍니다.
“내 그대 안의 선에 대하여 말할 순 있으나 악에 대해선 말할 수 없구나 악이란 무엇인가 다만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 실로 선이 굶주릴 때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먹이를 찾고 목마를 때면 죽은 강물이라도 마시는 법”
어찌보면 선의 결핍이 악일 수 있고, 치유받아야할 선이 악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악의 신비를 궁구하기 보다는 부단히 선을, 사랑을 체험하고 쌓아가는 것이 악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악으로 상징되는 가라지를 뽑는다고 해결될까요? 뽑을 수록 숱하게 생겨나는 가라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뽑아도 계속 돋아나는 가라지 같은 잡초들, 제초제를 뿌리면 밀도 땅도 죽습니다. 가라지들 없는 순수한 밀같은 선의 현실이 가능할까요. 아예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악의 가라지들 속에 단련되는 선의 밀들입니다. 제거가 아닌 함께 공존의 균형과 조화가 답입니다.
이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양방의 처방이 아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한방의 경우를 닮았습니다. 선과 악의, 밀과 가라지 세력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영적수행입니다. 농사를 짓는 밭의 이치만 봐도 이해가 됩니다. 채소밭을 그대로 놔두면 잡초밭이 됩니다. 그러나 채소들을 잘 가꿔 왕성해지면 잡초들도 점차 약화되어 힘을 못씁니다.
그러니 밀의 선한 세력을 강화하고 가라지 악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수행이 필수입니다. 순수한 선의 밀만의 세상이라면 영적전쟁도, 영적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은 무기력과 무의욕으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문제는 가라지 세력의 제거가 아닌 적절한 상태에서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실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보십시오.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밀로 보이다가 가라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내재한 선의 모습이 드러날 때는 밀인데 내재한 악이 드러날 때는 가라지입니다. 그러니 평화공존이 답입니다. 최종의 판단은,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으로 대변되는 주인의 말씀이 답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져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끝까지 밀에로의 가능성을 믿으며 기다리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일체의 판단은 유보한채 하느님을 닮아 공존의 사랑과 지혜로, 지극한 관용, 인내, 연민, 이해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하늘 나라 비전을 사는 길이자 가라지 악의 세력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겠습니다. 이에 대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좋은 도움을 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선의 밀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속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너희는 이땅에 영원히 살게 하겠다.”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우리 길과 행실을 바로 잡아 가는 것이 가라지 악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하늘 나라를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 <관자>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일을 잘 모르면 옛날을 비춰보고, 미래를 알지 못하면 과거를 살펴보라.”
현실적 삶의 지혜를 위한 필수 공부가 역사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하는 수행들이, 전례기도은총이,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라지 악의 세력을 견제하며 공존의 사랑과 지혜, 균형과 조화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 힘차게 나아가리이다.”(시편84;6,8ㄱ)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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