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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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28 | 조회수5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7/28일) : 연중 17 주일 * 제1독서 : 2열왕 4, 42-44 *제2독서 : 에페 4,1-6 * 복음 : 요한 6, 1-15
1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오늘의 강론> 오늘은 연중 17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빵”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2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곧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깨우치시고자 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이는 필요한 것이 “빵”이며, 그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곧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 그것은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사실은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찾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도데체가 ‘빵’을 주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보았지만, 그도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자 어른이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가난하면서도 지니고 있는, 무능하면서도 전능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십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외로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요한 6,15).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당신 생명의 충만함을, 당신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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