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세상 종말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양승국 신부님_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30 | 조회수92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구원이냐 멸망이냐?” 더불어Together, 귀가歸家의 구원 여정
"주는 온유한 자 의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를 배우게 하시나이다."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신 설명이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이라함이 맞지만 예수님 역시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의적 해설이라 더욱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1.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2.밭은 세상입니다. 3.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입니다. 4.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5.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입니다. 6.수확때는 세상 종말입니다. 7.일꾼들은 천사들입니다.
비유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원래는 하느님의 ‘인내’에서, 우의적 해설에서는 그 초점이 ‘심판’으로 바뀝니다. 저는 세상 종말을 죽음으로 바꿔 이해합니다. 죽음을 통해 인생 모두는 끝나고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세상 종말과 같은 현실이겠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말시 두 부류로 나뉘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히 드러납니다.
1.“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첨예하게 대비되는 구원과 멸망의 상태 인간들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하라면 누구든 둘째 번일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둘 중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미사도, 수행도, 회개도, 사랑도, 기도도, 공부도, 감사도, 희망도, 믿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더 기도하라고, 회개하라고, 사랑하라고, 공부하라고, 깨어 살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기뻐하라고, 믿으라고, 희망하라고 연장되는 우리의 생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힘껏 사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날마다 하루하루의 선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즘 널리 깊이 회자되는 이름이 김민기입니다. 사후 이처럼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매스컴 모두가 다루고 있으며 일간신문에는 사설에서 칼럼에서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종교란을 보니 무종교라지만 종교인 이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고 순수했던 삶이었습니다. 길다싶지만 여러 대목을 나눕니다.
“우리 모두는 김민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 삶과 예술이 합일하는 드문 경지를 보여준 김민기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그의 노래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늘 푸르렀던 사람, 그가 떠난 자리가 너무도 황량해 우린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이다. 명복을 빈다.” “나직한 음성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들어오는 ‘봉우리’. 맑고 슬픈 서사가 입에 감기면서 가슴을 감싸는 ‘백구’, 그리고 무던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한발한발 걸어가던 그분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어눌하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그 노랫말들을 다시 천천히 되뇌며, 공자가 진정으로 추구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의견이 좋고 내용이 충실하여 잘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함) 을 감히 떠올린다. ‘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제가 볼 때 김민기는 익명의 크리스천이요 세상 속의 누구 못지 않은 구도자이자 수행자였습니다. 김민기님을 위한 전주교구 이병호 퇴임 주교의 장례미사시 추모 강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미 신화가 전설이 된 김민기입니다. 제가 한 개인을 이렇게 길게 강론에 인용하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혹자는 윤동주와 비교하는데 그 이상일 것이며, 아마 곧 평전도 나오리라 봅니다. 이분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제가 요즘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1951년 생이니 저보다 두 살 아래로 참 자신을 많이 성찰 분발하게 합니다.
그러니 결국 가라지의 비유가 의도하는 바는 회개와 더불어 현재의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왔던 길을 돌아보는 까닭은,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헤매지 않고 바른길로 나아가고자 함이다.”<다산>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나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감사, 희망의 순서입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감사가 샘솟고 감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꽃피어납니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똥은 더러운 것이지만 싹을 북돋아 좋은 곡식으로 만든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뉘우침은 기도와 성찰이 포함된 회개로 읽으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새롭게 샘솟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입니다.
엊그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한 교황님의 담화문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떻게 노년을 맞이할까에 대해 좋은 도움이 되는,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조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능한한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 안에서 개인적 성취를 추구합니다. 공동체의식은 위태로워지고 개인주의가 찬양받고 있습니다. 곧 ‘우리’에서 ‘나’로의 전환은 우리시대의 가장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혼자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는 가정마저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의 희생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회적 유대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주의의 환상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에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 이를 깨닫습니다.”
교황님이 더불어의 공동체 삶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혼자와 더불어가 조화된 삶이요, 우리의 여정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의 여정중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할 때,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래야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선물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요셉수도원 공동체에 부임한 후 36년동안 정주하고 나니 하루로 하면 정오 12시에서 오후 4:30분쯤 된듯하고, 일년사계로 하면 늦여름에서 초겨울로 진입한 듯 이제 노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절박한 심정으로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고백은 이런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표한 예언자의 고백입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저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하루하루 아버지의 집으로의 더불어, ‘귀가의 구원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일일일생, 일년사계중 어느 시점에 있는지요?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들을 귀있는 사람은 비유의 진리를 깊이 듣고 깨닫고 알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구원의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흐뭇이 즐거워하라.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시편33,1).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