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상선 신부님_김찬선 신부님_~ 연중 제 17주간 화요일 - 구별과 차별하는 것이 가라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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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30 | 조회수5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묵상 나누기만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난 토요일 저의 나눔이었습니다.
오늘의 나눔은 이것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구별과 차별하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구별하지 않는 것,
특히 차별하지 않는 것이 밀입니다.
불교에서 구별은 부처가 할 짓이 아니고,
그러니 깨닫지 못한 자가 하는 짓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은 이 구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이라는 것 또는 가라지라는 것은 선에서 시작되지요.
이것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은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이것만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양단의 개념이란 것이 다 이렇습니다.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을 백이 아니면 다 흑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고,
그 이전에 흑과 백을 나누고 구별하는 것 자체가 나쁩니다.
구별이 이렇게 나쁘면 차별은 더 나쁩니다.
구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일 뿐인데 악한 것이라고 하고,
오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려 하는 것처럼
악한 것이기에 없애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늦잠을 잔 관계로 여기까지만 나누기 하려고 하는데
위의 나눔에서 악이란 죄의 악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선)를 파괴하는 죄악까지
괜찮다고 하거나 그런 죄악을 우리가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상선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물으십니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마태 13,36).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가라지에 더 꽃힌 것 같습니다. 분명 비유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로 시작하는데 비유 속 종들도, 비유를 듣는 제자들도, 그리고 이 복음 대목을 만나는 우리들도 종종 좋은 품종의 밀보다는 가라지에 더 신경이 쓰곤 하지요.
밀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마음에 머무릅니다. 그분 어조는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담담하게 담아냅니다. 뽑아버려야 한다고 나서는 종들의 호들갑이나 근심스럽게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반응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밀과 가라지, 그 둘의 공존을 인정하고 바라보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이것이 결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원한 행복을 보시는 거지요.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마태 13,41)이 가라지라면, 이를 조장하는 악의 실체와 함께 결국 불에 타 사라져 버릴 것이니까요. 아무리 현실이 악에 시달려 고통스럽고 황폐해져도 이 세상 창조의 원리가 사랑이고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사랑이시니 결국 사랑만 남습니다. 의인은 해처럼 빛을 내면서 결국 사랑이 찬연히 남으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다의 처참한 현실이 예언자의 애닯은 목소리로 읊어집니다. 침략과 기근, 질병과 두려움으로 비참한 백성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지요.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예레 14,20). 어찌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예언자는 백성을 대신해 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죄악과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 결과인 고통과 시련 역시 질기게 들러붙어 있지만, 그 아비규환 한가운데서 힘을 내어 일어나 주님을 향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예레 14,22). 모든 것을 무너뜨린 자기들의 죄악과, 처절히 겪는 결과적 징벌 상황 안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아 희망할 수 없을 때, 희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희망일 것입니다. 무너진 유다가 예언자의 입을 빌어 희망을 고백합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예레 14,22). 이 희망은 창조라는 원천적 축복으로 돌아갑니다. 창조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선하신 하느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만물이 결국 제 본성을 되찾아 사랑으로 회복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과 고통, 평화와 두려움, 창조와 소멸, 밀과 가라지... 이 모든 것이 세상을 두루 채우고 있습니다. 한쪽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되지요. 자신과 이웃과 세상 안에서 양편 모두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지혜는 영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낳습니다.
벗님! 예수님처럼 봅시다. 예수님은 모두를 아우르십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우리의 선함을 되찾아 주시고자 스스로 죄인이라 불리길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담담하고 선한 시선에 우리 눈길을 실어 우리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너른 들녘, 밀과 함께 살랑이는 가라지조차 아름답게 보인다면 사랑은 그만큼 지척인 셈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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